항목 ID | GC072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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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好仁 |
영어공식명칭 | Yu Hoin |
이칭/별칭 | 임계,뇌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출생 시기/일시 | 1445년 - 유호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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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62년 - 유호인, 생원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474년 - 유호인, 식년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80년 - 유호인, 거창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87년 - 유호인,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490년 - 유호인, 『유호인시고』 편찬 |
몰년 시기/일시 | 1494년 - 유호인 사망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
묘소|단소 | 대광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
사당|배향지 | 남계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원평리 586-1번지] |
사당|배향지 | 창계서원 -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선창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기계 |
대표 관직|경력 | 홍문관 교리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문신.
[가계]
유호인(兪好仁)[1445~1494]의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㵢溪)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신라 중엽에 좌아찬(左阿飡)을 지낸 삼재공(三宰公)의 후손이다.
고려 초 의신공(義臣公)이 고려에 불복하여 신라 왕을 섬기다가 기계현(杞溪縣)으로 유배되었고, 기계를 본관으로 하여 대를 이어 왔다. 그 후 유진경(兪晉卿)과 유공경(兪公卿) 두 형제 대에 유공경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고령에 정착하였고, 고려 후기 무신 유보(兪甫)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문헌에는 본관이 경상북도 고령으로 기록된 것이 대부분이다. 후손 유신공(兪信公)은 고령에서 호남의 장수(長水)로 이주하였다가 그 아들 유음(兪蔭)이 경상남도 함양에 거주한 장사랑(將仕郞) 이절(李節)의 딸과 결혼하면서 함양으로 이주하였다. 유음의 아들은 3형제이다. 장남인 유호인은 1445년(세종 27)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 유호인은 1462년(세조 8) 생원에 합격하였다. 그 후 1474년(성종 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을 제수받아 활동하였으나 효성이 깊어서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 등 관직을 거치면서도 고향에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여 1480년(성종 11) 거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을 지내고, 1487년(성종 18)에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4년(성종 25) 4월에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하다가 5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휴가를 얻어 어머니를 뵈러 와서 "북망군신격 남래모자동(北望君臣隔 南來母子同)[즉 국왕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니 비록 국왕 곁을 떠나 몸은 떨어져 있으나 충성은 변함없고, 고향 남쪽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만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어머니와 더불어 함께 하도다]"라는 시를 적었다. 유호인은 1490년(성종 21)에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 이 일로 표리(表裏)[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받았을 정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유호인의 시문은 문집인 『뇌계유집(㵢溪遺集)』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유호인의 기적비(紀蹟碑)는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에 있는 상림 위쪽 도덕바위 근처에 있다. 유호인의 종손가 후원에 가묘(家廟)[한 집안의 사당]가 있다.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대광마을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묘소와 어득강(魚得江)[1470~1550]이 쓴 비석이 있다.
[상훈과 추모]
유호인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남계서원(藍溪書院)과 전라북도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남계서원은 사적 제499호로, 1552년(명종 7)에 창건되었을 때는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위패를 모셨으나 숙종 때 강익(姜翼)[1523~1567], 정온(鄭蘊)[1569~1641]을 추가 배향했다. 남계서원 별사(別祠)에는 유호인과 정홍서(鄭弘緖)[1571~1648]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지금은 정여창을 주벽(主壁)[사당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 주장이 되는 위패]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