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25
한자 南陽洪氏
영어공식명칭 Namyang H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조선 전기 - 남양홍씨, 홍우평이 함양에 입향
본관 남양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입향지 나촌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상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척지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한남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운서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내곡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죽림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홍은열
입향 시조 홍우평|홍인손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홍우평, 홍인손 등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남양홍씨 세보』의 구보(舊譜) 서문에서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연원을 중국 당(唐)나라의 인물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전한다. 즉 당나라에서 재자(才子)[재주가 뛰어난 남자] 8명을 보내 고구려를 교화하게 하였는데 홍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족보에서는 그를 홍천하(洪天河)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전하는 홍은열(洪殷悅)이다.

고려시대 남양홍씨는 재상급 인물과 왕비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문벌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홍은열의 4세손인 홍덕위(洪德威)와 홍덕성(洪德成)이 문종 때에 각각 병부상서, 공부상서를 역임하였다. 5세손 홍관(洪灌)[?~1126]은 어사중승을 지내고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끝까지 시종하다가 순절한 공로를 평가하여 『고려사』 열전 「충의전」에 실렸다.

남양홍씨 가문이 번성하게 되는 것은 고려 후기에 와서이다. 원 간섭기에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8세손 홍사윤(洪斯胤)은 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면서 가문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홍사윤의 두 아들 홍진(洪縉)[?~1266]과 홍예(洪裔)도 과거에 합격하여 각각 병부상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다. 홍예의 아들 홍자번(洪子藩)[1237~1306]이 충렬왕 때 첨의중찬(僉議中贊), 홍진의 아들 홍규(洪奎)[?~1316]가 충선왕 대에 첨의정승(僉議政丞)을 각각 지내고 홍규의 손자 홍언박(洪彦博)[1309~1363]도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오름으로써 남양홍씨 가문은 고려 후기에 와서 3명의 수상을 배출한 가문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왕비도 배출하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외척 가문이 되었다. 홍규의 첫째 딸은 충선왕의 왕비 순화원비(順和院妃)이고, 둘째 딸은 충숙왕비 명덕태후(明德太后)로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다.

[입향 경위]

함양군에 남양홍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 건국 이후로, 그들은 모두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홍언박의 후손들이다. 현감을 지낸 것으로 전하여지는 홍우평(洪禹平)이 문종 때 서울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나촌(羅村)[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에 거주하였고, 그 자손들은 상동(上洞)[함양읍 운림리]과 산청(山淸)[경상남도 산청군]에 살았다. 중종 때는 홍인손(洪仁孫)이 서울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척지(尺旨)[함양읍 백천리 척지마을]에 거주하였다. 헌종 때 홍원엽(洪元燁)은 경상남도 진주(晉州)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한남(漢南)[휴천면 남호리 한남마을]에 자리 잡았고, 고종 때는 홍성구(洪性九)가 산청에서 들어와 남호(南湖)[휴천면 남호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입향 시기를 확인할 수 없지만 홍하중(洪夏重)은 서울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운서(雲西)[휴천면 운서리 운서마을]에 자리 잡았고, 홍근립(洪根立)은 산청에서 들어와 자손들이 내곡(內谷)[함양읍 죽림리 내곡마을]에서 살았다.

[현황]

2000년 기준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남양홍씨는 전국에 당홍계가 11만 7,638가구에 37만 9,708명, 토홍계가 9,250가구에 3만 662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하여 함양군은 당홍계가 95가구에 256명, 토홍계가 10가구에 25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남양홍씨가 전국에 48만 7,488명, 함양군에 307명이 각각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으로나 함양군 지역 모두 2000년에 비하여 남양홍씨 인구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관련 유적]

남양홍씨 병신보 책판(南陽洪氏丙申譜冊板)[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1호, 1998년 11월 13일]은 1716년(숙종 42)에 족보를 찍기 위하여 만든 책판(冊版)이다. 총 168매(枚) 가운데 결본(缺本)이 70매로 현재 98매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크기는 가로 55㎝, 세로 25.5㎝이다.

남양홍씨 함양 입향조의 한 사람인 홍인손의 후손 홍우녕(洪禹寧)[1660~1717]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고을에서 선대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계기로 책판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전하여진다. 당시 활자판 원본이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홍순백(洪淳白)에 의하여 보존되어 오면서 결실본(缺失本) 확인 작업이 가능하였다. 현존하는 보판(譜板)으로는 판각 연대가 상당히 앞선 것으로, 금석문 연구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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