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농민봉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351
한자 壬戌農民蜂起
영어공식명칭 Peasant Revolt in 1862
이칭/별칭 1862년농민항쟁,임술민란,임술농민항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2년 3월 16일연표보기 - 관가 난입,부호가옥 파괴, 향리가 방화 등 농민봉기 발생
종결 시기/일시 1862년 3월 21일연표보기 - 박만순·허형·우서구 주모자 3인 체포되며 종결
종결 시기/일시 1862년 6월 - 박만순·허형·우서구 주모자 3인 효수
종결 시기/일시 1862년 7월 5일 - 전 함양군수 오경선 등 경상우도 지역의 탐관들에 대하여 암행어사의 보고를 토대로 처벌
발단 시기/일시 1862년 - 삼정의 문란과 특히 환곡의 폐단 및 지역 관리들의 탐학
발생|시작 장소 임술농민봉기 발생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종결 장소 임술농민봉기 종결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성격 농민항쟁
관련 인물/단체 박만순|허형|우서구

[정의]

1862년 3월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발생한 반정부 농민 항쟁.

[개설]

경상남도 함양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1862년(철종 13) 3월 16일에 발생하였다. 농민봉기의 주된 원인은 삼정(三政)의 문란을 비롯해 환곡의 폐단에 대한 시정 요구가 수용되지 않은 것과 지역 관리들의 탐학 때문이었다.

[역사적 배경]

19세기는 조선의 역사에서 격변의 연속이었다. 그 전반기 60여 년은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국정의 파행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탐관오리의 득세와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백성들의 고통이 누적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봉기와 1862년 임술농민봉기가 연발하면서 백성들은 국왕의 무능과 집권관료들의 부패·지방관들의 탐학에 거세게 저항하였다.

헌종 때에는 함양군수·안의현감 등 경상우도(慶尙右道) 31명의 수령 중 20명이 부정부패로 인해 처벌되었고, 철종 때에도 전 함양군수를 포함한 경상우도 수령과 관리 49명이 유사한 이유로 처벌되었다.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는 지역민에 대한 수탈로 이어져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개선되지 않은 삼정의 폐단과 탐학에 따른 수탈은 1862년 경상남도 진주시와 함양군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경과]

1862년 3월 16일에 박만순(朴萬純)·허형(許炯)·우서구(禹書龜) 등이 주도하고 강치문(姜致文)과 장응팔(張應八) 등이 합세하여 통문을 돌리고 동조자들을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군수 오경선(吳敬善)이 상경하고 없는 것을 기회로 삼정의 혁파를 주장하면서 3월 21일까지 진행되었다. 참여자들은 주로 고노(雇奴) 용부(傭夫)로 구성되었고, 관가에 난입하고 부유한 자들의 집을 부수었다. 죄수를 영(營)으로 보내는 것을 거역하고 관장(官長)을 위협하였으며, 좌수(座首) 이하 장리(贓吏)들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평소 민원(民怨)의 대상이었던 향리의 집 15여 호를 부수고 불태웠다.

[결과]

경상남도 함양군의 농민봉기는 이 시기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들이 보여 주는 양상과 유사하다. 대체로 국지적으로 발생하면서 감정의 분출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에 의해 지방관의 문책과 농민 주동자들의 체포와 처벌로 대개 종결된다. 주로 탐관오리들로 인한 수탈에 따른 누적된 불만으로 폭발된 항쟁은 관청을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창고를 개방하고 관리들을 협박하거나 몰아내고 관리들의 가호를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임술농민봉기를 주도한 주모자 3인은 체포되어 경상남도 진주시로 압송 수감되었다가 6월에 효수(梟首)되었다. 그리고 1862년 7월 5일에는 전 함양군수(咸陽郡守) 오경선(吳敬善) 등 경상우도 지역의 탐관들을 암행어사의 보고를 토대로 처벌하면서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함양지역의 농민봉기는 1862년 삼남지역에서 일어난 임술농민봉기의 연속선상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로 경상남도 함양군의 농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삼정의 문란에 따른 폐단과 관리들의 탐학과 수탈에 저항한 생존을 위한 자구적 성격의 항쟁이었다. 임술농민봉기는 1862년 삼남지방(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중 진주시에 이어 군 단위 고을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당시 다른 지역의 항쟁들과 같이 결과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인근 고을인 거창군과 성주군에 영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1.12 내용 수정 1862년(철종 3)->1862년(철종 13)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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