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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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영어공식명칭 | Powerful Family |
이칭/별칭 | 토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있었던 지방 세력.
[개설]
나말여초 호족(豪族)은 지방에 성읍(城邑)이라는 독자적 영역을 만들어 주민들을 무장시키고 성주(城主)·장군(將軍)을 칭하면서 지방을 독립적·반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지방세력을 말한다. 호족을 출신별로 보면 해상 세력, 촌주(村主) 출신, 지방관 및 낙향 귀족, 군진 세력(軍鎭勢力) 등 계층이 다양하다. 신라 말 호부층(豪富層)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가 항쟁 세력을 끌어들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호족은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관할하에 호부(戶部)·창부(倉部)·병부(兵部)로 구성된 독자적 행정 조직인 관반체제(官班體制)를 갖추고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함양의 호족]
신라말 호족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보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유력한 친족집단이었다.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합 후에 호족은 중앙으로 진출해 정치권력에 참여하는 부류와 지방에 남아 재지 세력으로 토착기반을 강화한 부류로 분화되었다. 후자는 토성(土姓)층으로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들은 군현의 향리(鄕吏)와 이족(吏族)으로 자리하였다. 향리는 장리(長吏) 또는 외리(外吏)라고도 부르고, 군현의 읍격에 따라 주리(州吏)·부리(府吏)·군리(郡吏)·현리(縣吏)·역리(驛吏)·부곡리(部曲吏) 등으로 호칭되었다.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상남도 함양군과 안음현의 성씨(姓氏) 조에는 지역 토성으로 함양군은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씨, 이안현(利安縣)은 조(曺)·임(林)·김(金)·표(表)·하(河)씨 등을 들고 있다. 토성은 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나말여초 지방 세력인 호족의 후예라는 점을 고려하면, 경상남도 함양 지역사회의 10개 토성은 나말여초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경상남도 함양의 인근 지역인 진주와 의령 지방에는 유력한 호족이 자리 잡고 있는데, 나말여초 함양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 지역의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과 유문(有文), 의령 지역의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이다. 왕봉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중국의 후당(後唐)과 교류하는 등 세력이 강성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왕봉규는 처음 의령 지방을 근거지로 삼았으나 뒤에 진주 지방까지 장악한 것으로 보아 함양 지역도 관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삼국시대 호족의 동향]
경상남도 함양과 진주·의령 지역에 형성된 호족은 후삼국이 성립되는 시기에 처음에는 고려에 귀순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강주장군 윤웅이 920년(태조 3)에 아들 일강(一康)을 고려에 인질로 보내고, 고려에서는 일강에게 아찬 벼슬을 주고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일강의 처로 삼게 한 것이 그것이다. 927년에는 돌산향(突山鄕) 등 강주 관할 4개의 향이 고려로 귀속되었다.
그런데 유문은 928년(태조 11)에 후백제 견훤에게 항복한다. 이제까지 고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진주 일대 호족은 견훤의 공략에 따라 후백제 권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진주 지역뿐 아니라 경상남도 연안 일대가 후백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반적 추세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호족도 이후 후백제 영향권에 놓였을 것이다. 후삼국 말 함양을 비롯한 경상남도 연해 지역이 후백제 권역으로 편입되었던 경험은 고려가 후삼국 통합에 성공한 이후 지방을 편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