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3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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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下戰鬪 |
영어공식명칭 | Battle of Munhah Vill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지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9년 1월 1일 - 문하 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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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49년 1월 1일 - 문하 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문하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
종결 장소 | 문하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문하경찰전투부대|최홍식|국군14연대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에서 1949년에 발생한 여수·순천 반란군 토벌 전투.
[역사적 배경]
1948년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국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 등이다. 지리산 빨치산과 직접 관계된 1948년 10월 19일의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내의 숙군(肅軍)문제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파병을 거부하는 군인들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여수·순천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14연대 반란군과 지방 토착 좌익세력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인근 산악지대로 입산하였다. 무장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 빨치산·공비·유격대으로 불리었다.
[경과]
지리산에 입산한 반란군과 빨치산들은 낮에는 산속에 은거하고 밤을 이용해 인근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의복 등 필요물품을 탈취해 갔다. 마을 주민들은 반란군과 공비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경찰 수색대에 의해 고문을 당하거나 문초를 받는 등 고통을 받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
1949년 1월 1일,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는 문하 경찰 전투부대 임시 주재소장인 최홍식과 울산에서 지원 온 약 40명의 지원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리산에 입산했던 여순 반란군이 기습으로 공격하며 ‘문하 전투’가 발생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전투부대 경찰관 8명이 전사하고, 반란군 1명이 사살되었으며, 1명은 생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1948년 여순사건으로 반란군들이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빨치산들을 수색 토벌하는 과정에서 지리산 일대 민간인과 국군토벌대 등의 희생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