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고승이 머물던 자리를 따라 걷다 -지리산 칠암자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20
한자 高僧-智異山七庵子-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상현

[정의]

경상남도 함양의 지리산 권역에 자리하는 7곳의 사암과 그에 담긴 일화들.

[개설]

산은 인류에게 오래된 생활공간이었다. 산지가 국토의 7할을 차지하는 우리 땅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할 수 있다. 두류산 혹은 방장산의 별칭을 가진 지리산은 깊고 오묘한 산세와 더불어 곳곳에 산사(山寺)가 자리해 불교문화의 향기를 전해준다. 지리산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일대는 오래된 사찰과 암자들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함양군 마천면에서 전라북도 남원시에 다다르는 길을 ‘지리산 칠암자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승이 머물던 길을 따라 이곳의 사암(寺庵)들을 둘러보기로 하자.

[진정한 불자의 길, 청매스님을 만나는 도솔암]

칠암자길은 지리산 북부 능선 삼정산 기슭에 자리한 7개의 사암을 순례하는 약 16㎞에 달하는 숲길이다. 도솔암은 그 길의 출발점에 있다. 도솔암은 영원사의 부속 암자로 청매(靑梅)조사 인오(印悟)[1548-1623]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매는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청허 휴정(淸虛 休靜)의 법제자이다. 31세에 묘향산에 들어가 수행 중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승장(義僧將)이 되었다. 그리고 3년여 동안 왜적과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청매는 전국을 돌며 운수(雲水) 행각(行脚)을 하였는데, 지리산 영원사에 머물며 도솔암을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1년(광해군 9)에 왕명을 받아 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선수(善修) 등 5대 종사의 영정을 그리는 등 화사승(畵師僧)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청매는 5대 종사의 영정을 조사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자들을 경책한 ‘십무익송(十無益頌)’의 주인공도 바로 청매였다.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음이요[心不返照 看經無益], 자성(自性)의 실체 없음을 사무치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음이요[不達性空 坐禪無益], 원인을 가벼이 여기면서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도를 구해도 이익이 없음이요[輕因望果 求道無益], 바른 법을 믿지 아니하면 고행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음이요[不信正法 苦行無益], 자기 고집을 꺾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음이요[不折我慢 學法無益], 안으로 실덕(實德)이 없으면 밖으로 위의를 드러내어도 이익이 없음이요[內無實德 外儀無益], 타인의 스승이 될 만한 덕이 없다면 중생을 제도해도 이익이 없음이요[欠人師德 濟衆無益], 마음이 신실(信實)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잘해도 이익이 없음이요[心非信實 巧言無益], 일생 동안 고집을 버리지 못하면 대중과 함께하더라도 이익이 없음이요[一生乖角 處衆無益], 배 속에 무식만 가득하다면 교만하여 이익이 없음이니라[滿腹無識 驕慢無益].”

산중에는 청매가 입적한 후 봉안한 승탑과 관련하여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처음 승탑은 영원사 오른쪽 솔숲에 봉안하였는데, 환하게 빛을 발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았다고 한다. 뒷날 가까운 곳으로 옮기니, 그 빛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마천면에서 함양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오도재(悟道재)라 부르는 것도 청매 스님이 도를 깨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독립운동가의 산실, 영원사]

양정마을에서 작은 길을 따라 산속으로 한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수많은 고승이 머물다간 영원사이다. 절은 유장한 산줄기가 감싸주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높이 900m가 넘는 이곳은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이다. 영원사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세워진 절 안내판에 눈길이 머문다. 백초월(白初月)이 머문 자리라고 한다.

절은 신라 경문왕 대 영원(靈源)조사의 창건이라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하여도 아홉 채가 넘는 당우(堂宇)에 1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고 한다. 사중에 전하는 『실화상록(失火詳錄)』에 따르면 1912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는데, 그 후에 더 많은 수행자가 운집하였다고 한다. 또한 1938년에 찍은 가람의 모습이 다실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이후 복원된 온전한 가람이다. 그러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당우는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법당에는 ‘두류선림(頭流禪林)’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에 ‘109조사 영제’가 거행된다는 현수막이 달려 있다.

인기척을 내어 스님을 찾으니 법원 주지 스님이 안내한다. 두 해가 넘게 비어 있던 절을 스님이 정돈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되찾았다고 한다. 스님이 펼쳐 보인 ‘용상방(龍象牓)’을 보니 이곳에서 용맹정진하던 선승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용상은 수행자를 물에서 으뜸인 용과 뭍에서 으뜸인 코끼리에 비유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용상방’은 용상에 해당하는 수행자들의 명단이다. 수행 기간 승가 생활의 일상 대소사를 각자 역할 분담하여 붙이는 대자보인 격이다. 이는 영원사에 때마다 선객(禪客)들이 모여들고 역할을 나누어 정진한 자취라 할 수 있다.

절에는 『승적부』·『기일록』·『사적기』 등이 전해오는데, 그 가운데 『조실안록(祖室案錄)』이 특히 눈길을 붙든다. 『조실안록』에는 영원사에서 주석하였던 부용 영관, 청허 휴정, 사명 유정, 청매 인오 등 109명의 고승들이 등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초월 동조(初月 東照)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친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초월 동조에게 영원사는 출가지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주지직을 재임(再任)한 곳이기도 하였다. 초월 동조는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출신으로 13세에 영원사로 출가하였다.

초월 동조는 1919년 4월에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에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0년 2월 25일에는 재일 유학생들이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한 활동을 지원하던 중 체포되었다가, 같은 해 3월 9일 서울의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귀국한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봉천행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고,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으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간화선(看話禪)의 연원, 상무주암]

영원사를 출발해 골짜기를 따라 상무주암으로 향한다. 숲속의 나무들이 부처라면 지저귀는 새소리는 목탁 소리처럼 경쾌하다. 찻길은 애당초 없고, 오롯이 두 다리로 품을 팔아야 오를 수 있는 곳이 상무주다. 그렇게 가파른 산길을 잠시 오르면 능선을 만나고, 능선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끔씩 지리산 주 능선이 유장하게 다가온다.

암자는 삼정산[1,225m] 울창한 숲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상무주암[1,162m]이 언제 생기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작은 산중암자는 보조 지눌(普照知訥)[1158~1210]이 이곳에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사실이 각인되어 있다. 보조 지눌의 비명(碑銘)[묘비에 새긴 글]에는 자신이 이곳에 머물던 시절을 ‘경치가 그윽하고 그 고요함이 천하의 으뜸으로 참으로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지눌은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고, 이곳에 올라 몇몇 선객(禪客)들과 함께 뼈를 깎는 정진에 들어갔다. 그때가 1198년, 지눌의 나이 41세였다. 이곳에서 지눌은 ‘바깥 인연을 물리치고 오로지 안으로 자신을 관조하는[內觀]’ 수행에만 전념하여 궁극의 근원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대혜 종고(大慧宗杲)[1089~1163]의 어록을 보다가 마음의 깨달음을 얻었고, 자연히 가슴이 후련해지며 곧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전한다. 다음은 지눌의 회고담이다.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생활을 하는 곳, 사량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도 말고 참구하여야 한다. 홀연히 눈이 열리면 바야흐로 모두 자기 집안일임을 안다”고 하였다. 이에 뜻이 들어맞아 자연히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와 처소를 같이하지 않아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대혜어록』을 통한 지눌과 대혜의 만남은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보편화된 대혜의 간화선(看話禪)이 최초로 주목되고 또 소개된 것이 이 만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후에 지눌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경절문(經截門)’의 이른바 세 가지 길[三門]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였는데, 화두를 참구해서 바로 깨쳐 들어가는 ‘경절문’의 연원이 바로 이 상무주암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보조 지눌 이후 수행처로 각광받은 상무주는 수선사의 제6세 사주가 되는 원감 충지(圓鑑冲止)[1226~1293]도 그 자취를 남겼다. 정혜사(定慧社)에 머물던 대선사 충지는 1284년 3월에 홀연히 절을 떠나 이곳 상무주에 올랐다. 충지의 비명[증시원감국사비명(贈諡圓鑑國師碑銘)]에는 당시의 수행 모습을 “혼자 선정에 들매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 발자국이 무릎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지혜에 이르는 공덕은 무엇인가? 지리산 문수암]

예로부터 지리산방장산이라 불리며, 불교에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상무주암문수암은 숲길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길목마다 말라죽은 고목과 바위를 덮은 검푸른 이끼, 고사리나 부처손 같은 양치식물들이 즐비하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시냇물은 메아리처럼 멀고 아득해 소리로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 보면 문득 바위를 등진 지붕 하나를 만나는데, 그곳에 문수암이 새집처럼 소박하게 앉아 있다.

문수(文殊)는 산스크리트어로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되며 ‘지혜가 뛰어난 공덕’으로 풀이된다. 그 때문에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양옆으로 협시보살이 되어 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을 이룬다. 문수암이 자리한 곳은 높이 1,060m 고지이자 거대한 바위 아래다.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맨 먼저 샘에 이르러 목을 축인다. 물소리는 법문 같고 맛은 달다. 수각에는 눈 뜬 물고기를 새겨놓았다. 절에서의 물고기는 항상 눈을 뜨고 게으름 없이 공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속의 생물과 게으른 중생을 일깨우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법당이나 탑의 처마 밑에 풍경(風磬)으로 달아 용맹정진의 상징으로도 여기고 있다. 돌층계를 오르면 천인굴이 나온다. 바위는 석굴을 이루고 있고, 바위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동굴을 울린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켜니 마음의 때까지 시원하게 씻겨내리는 것만 같다. 천인굴은 임진왜란 때 인근의 동네 사람들이 몸을 숨겨 피신한 곳이라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지리산 일대는 왜군과의 격전장으로,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에 있는 이곳은 많은 피란민이 몰려든 곳이었다. 이름과 같이 천 명까지는 모르지만, 수십 명은 족히 들어앉을 정도의 크기이다.

암자는 659년(무열왕 6)에 마적(馬跡)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의 문수암은 196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선학원 소속으로 1965년 혜암(慧菴)[1920-2001]이 중창한 것이라 한다. 혜암이 이곳에 주석하던 때 영원사와 도솔암의 스님들이 와서 배웠다고 한다. 해인총림 제6대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 제10대 종정에 추대되기도 한 혜암은 쉼 없는 정진과 서릿발 같은 가르침으로 불제자들을 이끌었다. 혜암은 ‘위법망구(爲法忘軀)’ 즉,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몸을 버릴 정도로 하라’는 평생 법문과 함께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용맹 정진으로 유명하다.

[깨달음의 골짜기, 삼불주의 삼불사]

문수암에서 50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불사가 작고 소박하게 앉아 있다. 암자가 있는 곳은 작은 삼정산[1,156m] 아래다. 지나온 상무주나 문수암보다는 조금 큰 규모이다. 법당을 중심으로 뒤로는 산신각이, 마당 앞으로는 탑과 석등이 서 있다. 법당에서 떨어진 곳에는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이 한 채 들어서 있고, 멀찌감치 해우소가 있다. 삼정산 자락에는 ‘견성(見性)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때 나그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을 떠올린다. ‘견성’은 참된 자아, 곧 그 성품을 바로 보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 성품을 보고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이다.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앎으로써 깨달은 자인 부처가 된다는 말인 것이다. 그만큼 이 골짜기는 불심이 깊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들린다.

마당에 서니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불사의 삼불주는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의 삼신불을 의미한다. 육신(色身)은 집과 같다. 삼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성[자신의 성품]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으나 어리석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찾는다. 육신 속에 있는 청정한 법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화신(化身)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생각하는 것마다 선하다면 보신(報身)이다. 이 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닦는 게 귀의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자성에 미혹되면 중생이 되는 것이다.

삼불사를 출발해 삼정산 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 약수암으로 들어선다. 약수암은 백장암과 더불어 실상사(實相寺)의 오랜 수행처로 알려진다. 약수암을 나와 1㎞ 남짓한 임도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평지가 나오고, 얼마 가지 않아 실상사를 만난다. 이처럼 지리산 칠암자길은 지리산 삼정산 능선과 그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7개의 절과 암자와 용맹정진의 고승들을 만나는 순례자의 길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