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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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介坪里-古宅-建築 |
영어공식명칭 | Gapyeongri-An old house-Architectur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지환 |
함양 일두고택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번지 | |
함양 풍천노씨대종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44-11 | |
함양오담고택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66-1[개평리 217-1] | |
기획항목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고택을 통해 살펴본 조선 시대 선비들의 주거 문화와 변천.
[개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은 2개의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낄 개(介)’자의 형상을 보이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14세기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면서 전통 마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개평마을은 함양군 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반촌이자 함양 출신의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마을로, 하동정씨와 풍천노씨로 구성된 대표적인 씨족 마을이다. 600년의 전통을 가진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조선 후기에 지어진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표적인 곳으론 일두 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오담 고택 등이 있다.
[개평마을의 입지]
행정구역상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속하는 개평마을은 하개평리에 있다. 안의면과 함양읍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도승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있다. 마을을 둘러싼 산과 개울, 주변의 소나무가 마을의 경관을 구성하고 있고, 마을 서북부의 넓은 들판은 우리나라 전통 마을의 경관 특성을 잘 보여준다. 개평마을은 하동정씨와 풍천노씨로 구성된 씨족 마을로서, 전체적으로 장방형의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동저서고(東低西高)의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마을의 중요한 혈 자리에 전통 가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문의 위계적 구조가 나타난다. 풍수지리적으로 도승산의 주맥이 내려와 혈이 뭉친 중요한 자리에 일두 고택이 있다. 개울 주변에는 노씨 종가의 터가 있고, 마지막 맥의 기운이 있는 장소가 옥계 노진(盧禛)이 태어난 곳이다. 세 터는 처음 마을에 입향하여 터를 잡은 순서와 일치하며, 각 고택을 중심으로 분가가 이루어져 마을 내에서의 가문의 영역적 위세를 보여 준다. 마을의 형성 초기에 입지 분포는 마을 내에서 가장 좋은 혈 자리부터 건축이 시작되었고, 그다음 좋은 터를 순서로 마을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위의 세 터에 앉은 집들은 모두 남향을 하고 있으며, 고택으로의 진입이 길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초기 고택을 기준으로 건축물의 입지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하동정씨의 경우 최초 입향한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좌·우측으로 영역 확장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분가 고택은 고택을 중심으로 증축하여 3개의 하동정씨 영역이 형성되었다. 각 영역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며, 도승산의 주령(主嶺)[잇따라 있는 고개 가운데 가장 높은 고개]을 따라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평행하게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풍천노씨는 노씨 종가와 옥계 집터의 공간 중심성이 약하다. 초기에는 인접하여 분가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이후 개울 건너편으로 주거입지를 선정하고 분가 정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가문의 열등과 확장 공간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동정씨가 종손 위주의 종파 중심적인 것에 반해, 풍천노씨는 지손[지파(支派)의 자손] 계열에서 인물이 나온 것으로 보아 문장 중심적인 계보적 특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개평마을은 ‘행주형(行舟形)’ 마을로, 대부분의 집이 남쪽을 향해 들어서 있다. 일두 고택의 경우 정남향을 약간 벗어나 남쪽의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고 있다. 이는 지형과 옥계천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집을 앉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개평마을 고택들의 좌향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노씨 종가의 경우 정남향을 피하고 있다. 개평마을의 집은 대부분 ‘ㅡ’자 형의 건축이 많으며, 이는 경상도 지방의 민가 유형에 부합한다. ‘ㄱ’자 형의 집도 분포되어 있으며, ‘ㄷ’형과 ‘ㅁ’형은 비교적 규모가 큰 양문중의 종갓집에서 보이고 있어 종가로서의 권위를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평마을의 건축 배치 유형은 오래된 것일수록 ‘ㅁ’자형에 가깝고, 집채의 분화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대지 규모는 500~1,000㎡ 정도이다. 하동정씨의 경우 ‘ㄱ’자 형의 배치가 많은 반면, 풍천노씨는 ‘ㅡ’자 형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하동정씨 고택의 경우 사랑채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개평마을 주거 건축의 평면은 안채의 경우 부엌-방-방 또는 부엌-방-대청-방의 단순한 평면이 가장 많다. 풍천노씨의 경우 부엌-방-대청-방과 부엌-방-방-대청-방인 반가로서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하동정씨의 경우 평면구성이 부엌-방-대청-방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평면의 구성이 커진다. 하동정씨의 경우 수납공간을 가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가문의 정체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모두 툇마루의 발달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적극적으로 연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사랑채의 경우 하동정씨는 19세기 이후 규모가 축소되는 반면, 풍천노씨의 경우 19세 후반으로 갈수록 대청과의 겹집 형태 구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일두 고택]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함양 일두 고택은 국가 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것으로, 조선 성종 때 인물인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옛집이다. 지정 당시 명칭은 ‘함양 정병호 가옥’이나, 조선조 오현(五賢)의 한 사람인 정여창의 고택으로 유명하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여창의 타계 1세기 후 그의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개평마을 중앙에 있는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부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이다. 대지 주변으로 돌담장이 구획되어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 직진하면 안채로 향하는 일각문이 나타나고, 왼쪽으로 가면 사랑채가 나타난다. ‘ㄱ’자 형의 사랑채는 높은 기단에 조성되어 있으며,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쓰여져 있고 전퇴(前退)[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가 있다. 일각문을 지나 사랑채 옆면을 따라가다 보면 중문이 나타나고, 이후 ‘ㅡ’자 형의 안채가 나타난다. 왼쪽에는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 뒤쪽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안채 뒤 별도로 만든 담장 안에는 가묘(家廟)[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가 있어 유교적 사상을 가진 가문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두 고택의 공간 구성은 대지의 중심부에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후면과 전면에 각각 안채와 안곳간채가 마주 앉아 배치되어 있다. 전면 우측에는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 좌측에는 옛사랑채가 있으며, ‘ㄱ’자 형의 새사랑채가 덧붙여져 전체적으로 ‘ㅁ’자 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를 중심으로 우측에 사당과 광채가 있고, 앞쪽에 곳간채, 좌측하단에 문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각 건물이 둘러싼 형태이다. 또한 중심부 앞쪽에 있는 곳간채들이 ‘ㅁ’자 형의 중심을 향하도록 좌향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주변부의 건물들이 모두 중심부인 ‘ㅁ’자형 안마당 정면을 향하고 있는 배치는 중심과 주변의 개념이 도입되어 건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공간상 외부의 담장은 동선을 유도하기 위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내부 담장은 마당을 분할하고 시선의 차단과 동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여 공간의 전이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솟을대문과 중문은 내부 공간을 경계 짓는 요소로서 내부 공간에서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중문은 1칸의 크기로 내부의 안마당을 강조하기 위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으며, 상징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걸려 있고, 사랑채 마당에는 인공산을 조성하였으나 현재는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현재의 안채는 169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는 1843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조성 시기 차이가 약 150년에 이르기 때문에 조선 중기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주거 건축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옛 손길을 그대로 간직한 세간들이 가득한 일두 고택은 양반가의 기품과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또한 TV 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로 알려지면서 문화유적 관광객들의 필수적인 방문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함양 풍천노씨 대종가]
함양 풍천노씨 대종가는 15세기에 함양 입향조인 노숙동(盧叔仝)의 고택으로 지어졌는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근대에 들어 신축한 것이나, 안채 초석이 방형으로 다듬어 주좌까지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법 큰 규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택의 배치는 안채, 사랑채, 사당, 아래채, 창고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종도리에 ‘공탄(孔誕) 2376(二三七六)년’이라는 건립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1824년(순조 24)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택의 배치는 대지 안쪽에 ‘ㅡ’자 형의 안채를 남향하여 배치하고, 앞으로 사랑채가 나란히 있다. 사랑채 바로 앞으로 대문채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 사이 동쪽으로 곳간채, 서쪽으로 행랑이 직각으로 놓여 전체적은 튼 ‘ㅁ’자 형의 배치를 가지고 있다. 곳간채 뒤쪽으로 담장을 만들어 사당 영역이 별도로 구성되도록 하였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전·후퇴를 두고 있다. 서측에 조성된 정지칸은 입식 부엌으로 개조되어 있으며, 퇴를 달아 수세식 화장실, 욕실, 보일러실이 설치되어 있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건넌방 바깥쪽으로 쪽마루를 설치하여 전면 툇마루와 연결되어 있다. 대청 후퇴 부분은 마루의 단이 높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노씨 종가의 기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행랑은 ‘ㅡ’자 형으로 정면 3칸, 전퇴가 있는 측면 1칸 건물이다. 전·후퇴를 사용한 것이나 간결한 가구기법, 장식적 기법 등과 안채 종도리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 표현되고 있어 학술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함양 오담고택]
함양 오담고택은 마을의 서쪽에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7호이다. 구성은 안채, 사랑채, 광, 부속 창고로 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사랑채는 고택 대지 전면의 정면 4칸과 측면은 어칸과 전·후퇴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퇴칸은 전퇴칸에 비해 큰 규모로 비대칭의 단면 구조를 보이고 있다. 전면 툇마루에는 두리기둥을 두었고, 나머지에는 방주를 사용하였다. 기둥은 약한 민흘림기둥으로 적송을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맞배지붕 좌우측에 퇴를 달고 부섭지붕을 설치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으로 우측 방 전면 툇마루는 약간의 높이차를 두고 있다. 칸의 규모는 정지칸과 마루칸, 건넌방칸이 안방칸에 비해 폭이 넓게 구성되어 있으며, 정지 위에는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는 다락과 수장처를 두고 있다.
안채는 대지의 가장 안쪽에 있으며, ‘ㅡ’자 형 집으로 정면 5칸, 측면은 전·후퇴를 포함하여 3칸의 규모이다. 건물 정면 좌우에 툇간을 들여 공간을 넓게 사용하려는 점이 특이한데, 우측 툇간은 툇마루로 이용하여 건넌방으로 향하는 동선으로 사용하고 좌측의 툇간은 부엌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좌로부터 부엌 1칸, 안방 2칸, 대청 1칸, 건넌방 1칸으로 평면을 구성하였으며, 건넌방의 툇마루를 약간 높여 누마루 형식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또한 이곳에 머름형 난간을 두어 낙상을 방지하고 있다. 배면에는 대청 1칸을 개방하여 뒷마당으로 쉽게 갈 수 있도록 구성하였고, 배면과 측면은 화방벽으로 마감하였다.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하면 사랑채는 1838년, 안채는 1840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부재의 단면 크기가 작고,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한 가구 기법이나 전·후퇴칸이 모두 적용된 주거 건축양식에서 조선 후기 건축기법이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오담은 조선 시대 정환필 선생의 호(號)로, 오담 고택은 조선 시대 사대부 가옥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함양 노참판댁 고가]
함양 노참판댁 고가는 개평마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0호로 지정돼 있다. 상량문에 기록된 건축 연도가 오래되어 확인이 불가하나, 마을 주민들의 의견으로 보아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안채의 앞마당 좌우에 광 1채, 억새로 만든 3칸 집이 더 있었으며, 대문 밖에 하인들이 거처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소실되어 없어졌다. 지금은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 안쪽에 ‘ㅡ’자 형 평면의 안채가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앞쪽으로 ‘ㅡ’자 형의 사랑채와 ‘ㄱ’자형의 광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와 광채 앞으로 대문채가 있으며, 안채의 북동 방향으로 1칸 규모의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으로 우측 1칸에 대청을 두고, 옆방에 툇마루를 다른 마루보다 높게 설치하였다. 대문채에서 사랑채의 측면을 돌아서면 안채가 나타나는데, 규모는 작으나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둔 구조이다. 평면 배치는 사랑채와 유사하며, 서쪽에 정지칸을 두고 옆으로 방, 대청, 아랫방 순서로 구성하였다.
노참판댁 고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안채의 온돌방과 대청의 출입문 상부에 설치된 광창의 장식이다. 광창은 옆으로 폭이 넓은 창으로, 통풍과 일조의 기능을 담당한다. 노참판댁 안채의 광창은 창살 문양이 완자살로, 중앙의 정사각형 살을 감싸는 8각형 살을 중심으로 수평과 수직 살이 얽혀 있다. 안채의 기단은 두벌대로 자연 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으며, 건물의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함양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
함양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돼 있다.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1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부섭지붕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채에서 인접한 사랑채와 안채까지의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과거에 다른 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입로의 토석담을 따라 정면 5칸 솟을대문이 있으며, 가운데 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양측 칸을 측간과 창고로 사용하였다.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에 측면 1칸으로 일본식 기와가 사용되어 있으며, 부재의 크기로 보아 본래에는 초가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