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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10
한자 鄭汝昌-嶺南儒林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50년 - 정여창,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4년 - 정여창, 경상도 안음현감(安陰縣監) 부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8년 - 정여창, 무오사화로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04년 - 정여창, 함경북도 종성에서 사망
남계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원평리)지도보기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정여창의 생애와 정치활동, 학문과 사상 그리고 당시 영남 사림의 동향을 고찰.

[개설]

정여창은 1450년(세종 32) 경상도 함양의 덕곡리(德谷里) 개평촌(介坪村)[지금의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 자택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정지의(鄭之義)로 판종부시정(判宗簿寺正)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 정복주(鄭復周)는 고려 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거쳐 조선 건국 후 도관정랑(都官正郎), 지경성군사 겸 지병마방어사, 첨절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은 1460년(세조 6) 평안북도의 의주부 통판을 역임하였으며, 1467년(세조 13) 병마우후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다 전사하였다. 어머니는 경주최씨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정여창은 율정 이관의(李寬義)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을 폭 넓고 깊게 이해하고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더 비중을 두어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1483년(성종 14) 34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90년(성종 21) 학행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으로 등용되었다가 그 해 과거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를 지냈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1504(연산군 10) 4월 1일 유배지 종성(鍾城)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출신과 가문]

하동정씨는 족보상으로 계통을 달리하는 세 가계가 존재한다. 그중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삼는 가계는 석숭(石崇)-탁신(卓申)-의균(義均)-연서(延叙)로 세계가 이어지고, 정연서는 국룡(國龍)[국용]과 국교(國僑) 두 아들을 둔 것으로 다시 가계가 분화되고 있다. 정국용은 지연(芝衍)과 난연(蘭衍) 두 아들을 두었다. 이때 정지연이 고려 충숙왕 대에 찬성사라는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보아, 이 가계는 이미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가문이 되었다.

정지연의 두 아들은 익(翊)과 유(宥)이다. 정익의 후손이 정인지(鄭麟趾)[1396-1478]로 이어지면서 계속 거경 사족으로 남아 있었고, 정유의 후손은 정여창으로 계승되면서 경상남도 함양군에 대대로 살았다. 정지연의 둘째 아들 정유는 견(堅)과 현(賢)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정견의 후손은 지의(之義)-복주(復周)-육을(六乙)-여창·여유(汝裕)·여관(汝寬)으로 이어졌다. 정현의 아들 정지인(鄭之仁)은 희주(希周)·계주(繼周) 두 아들을 두었다. 정희주의 아들이 의백(宜伯)이고 손자가 원서(元敍)이며, 정계주의 아들이 신(新)이고 손자가 윤창(允昌)이다.

1656년(효종 7)에 편찬된 함양 최초의 읍지 『천령지』 인물조에서는 하동정씨 인물로 맨 처음 정복주[1367-?]를 소개한다. 정복주는 고려 후기 판종부시사를 지낸 정지의의 아들로, 치소(治所) 북쪽의 개평촌(介坪村)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하동정씨가 경상남도 함양으로 입향하는 것은 정지의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로, 이후 함양의 하동정씨정복주-정육을-정여창으로 이어지면서 함양의 세거 성씨가 되었다.

정여창은 자가 백욱(伯勖)이고, 호는 일두(一蠹) 또는 수옹(睡翁)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450년(세종 32)에 경상남도 함양의 덕곡리(德谷里) 개평촌 자택에서 태어났다. 정여창의 증조할아버지는 정지의로 판종부시정을 지냈고, 할아버지 정복주는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태종 이방원과 같은 나이였다. 1402년(태종 2)에는 도관정랑(都官正郎)으로 활동하고, 지경성군사 겸 지병마방어사를 거쳐 첨절제사·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복주는 학문과 법의 정통을 주장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엄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여창의 아버지는 의주통판을 지낸 정육을이고, 어머니는 경주최씨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이다. 정여창의 아버지는 무과로 진출하여 사직(司直)을 지내고,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따른 바 있다. 1455년(세조 1) 12월에는 정난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錄勳)[훈공이 장부나 문서에 기록]되었다. 1464년(세조 10) 8월에 내자윤(內資尹)의 지위에 있으면서 윤대(輪對)에서 의주(義州) 조몰정(鳥沒亭)의 땅을 경작할 방책을 건의하였고, 같은 달에 전라도에서 도적이 발생하자 이것을 토벌하는 책임을 맡았다. 1467년(세조 13) 5월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자, 함길도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하여 난을 진압하던 중 전사하였다. 정여창의 아버지는 사후에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으로 녹훈되고, 한성부좌윤에 추증(追贈)[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되었다.

정여창의 가문은 증조할아버지 정지의 때 경상남도 함양으로 이주하여 함양의 재지 사족으로서 위상을 가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속적으로 관료가 되면서 수도를 비롯한 근기 지역[서울에서 가까운 곳]에도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여창은 종실(宗室)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딸인 정종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정여창의 누이 또한 태종의 증손인 영인군(寧仁君) 이순(李楯)에게 시집갔는데, 이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상남도 함양에만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는 이 같은 혼인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1490년(성종 21) 7월 26일에 사섬시정(司贍寺正) 조효동(趙孝仝)이 정여창을 천거하는 상서에는 정여창의 가세를 엿볼 수 있는 언급이 보인다.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 당시 순절하였을 때 시신을 거두어 법도에 맞게 장례 치른 일,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봉양하고 장례를 극진히 치른 일, 어머니 생전에 저축이 넉넉하여 함양의 사방 이웃 백성들이 모두 와서 곡식을 꾸어갔다고 한 점, 노비가 많아서 집 안에 100구나 되었다고 한 점이 그것이다. 이는 정여창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매우 튼튼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모두 선조부터 전하여 내려온 전택·노비와 증조할머니·할머니 및 어머니 쪽의 재산이 첨가된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순절한 대가로 국가적인 포상을 받았고, 종실의 사위가 됨으로써 누대에 걸쳐 내외변으로부터 전래된 토지와 노비가 많았던 것이다.

[정치활동]

정여창은 1483년(성종 14)에 34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응시하면서 그 경력 사항을 전력부위(展力副尉)라 기재하였다. 전력부위는 종 9품의 무산계로, 1436년(세종 18)에 처음으로 종 9품의 무산계인 진의부위(進義副尉)가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전력부위로 개칭되어 실려 있다. 정여창은 이때까지 전력부위라는 무산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관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무산계를 가지게 된 것도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 때 순절한 데 따른 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될 때까지 정부에서 관직을 갖고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이전부터 정여창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478년(성종 9)에 종실 인물인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은 상서(上書)하여 태인현(泰仁縣)의 정극인(丁克仁), 은진현(恩津縣)의 강응정(姜應貞)과 함께 함양의 정여창을 ‘성현(聖賢)’의 무리라고 왕에게 보고한 바 있다. 1480년(성종 11)에 국가에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經明行修者]’를 구할 때 성균관 유생의 압도적인 천거를 받은 바 있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생원 신분이었던 정여창의 첫 정치 활동은 1483년 9월 11일에 승려의 도첩 남발을 중지하라고 건의한 것이었다. 정여창은 승려를 토목공사에 동원한 대가로 승려가 도첩을 받게 되면 부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자가 많게 될 것이므로, 유학을 훼손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여창은 1490년 12월의 문과 별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응시하면서 경력으로 ‘참봉’을 기재하였다. 소격서 참봉의 직에 있으면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이다. 정여창이 소격서 참봉이 되는 것은 이해 7월 조효동(趙孝仝)이 상서하고, 정여창의 여러 행적을 나열하면서 적극 추천한 데 따른 것이다. 조효동의 건의를 들은 성종은 “정여창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내가 저절로 눈물이 난다. 빨리 뽑아 써서 국가에서 선행을 표창하는 뜻을 알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도승지 신종호(申從濩)가 현지 조사를 거쳐 신중하게 임용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좌승지 김제신(金悌臣)이 정여창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하면서 정여창의 사람됨을 아는바, 이는 지나친 칭찬이 아니라고 천거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1490년(성종 21) 7월 26일에 정여창은 장사랑(將仕郞) 소격서 참봉으로 임용되었다.

정여창은 소격서 참봉에 임명된 지 1개월여 만에 참봉직의 사직을 요청하였다. 효자가 아님에도 효자로 알려진 것은 고을 사람들을 속인 것이며, 이 때문에 천거된 것은 임금을 속이고 국가를 기만한 행위라는 것이 사직의 이유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과 별시에 합격한 후에는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당시 세자 사부의 한 사람으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연산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설서로 있다가 1494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안음현감으로 발령 났을 때 사람들은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 정여창의 적임이 아니라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정여창이 부임해서 백성들이 가혹한 수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편의(便宜) 수십 조를 만들어 시행하자, 한 해가 지나 정사(政事)가 맑아지고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또한 판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옥사나 형률을 쓰는 것이 정밀하고 합당한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순행하여 직접 대면 조사한 뒤에 시행함으로써 형 집행에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여창은 이렇게 지방관으로서 실적을 올렸지만 벼슬살이를 즐거워하지 않았고, 장차 시골로 돌아가 은거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정여창은 1498년(연산군 4) 7월에 발생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길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7월 12일에 김일손(金馹孫)이 체포되었다. 7월 15일 유자광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 삼으면서 시작된 무오사화는 김일손, 정여창 등에 대한 몇 차례의 국문을 거쳐 그 관련자들을 사형과 유배로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사화 발생 10여 일이 지난 7월 26일에 윤필상(尹弼商) 등이 사화 관련 인물들의 죄목과 처벌 내용, 유배지 등을 결정하여 올렸다.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등은 대역죄를 지었다고 하여 능지처사와 참수형으로, 정여창·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홍한(洪澣)·정희량(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康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정여창은 유배지 종성에서 7년을 보내고, 1504년(연산군 10) 여름 4월 1일에 향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정여창은 처음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에게 수학하여 성리학을 알게 되었다. 이관의는 이천(利川)에 임시로 머물렀는데, 경술(經術)에 밝고 덕행(德行)을 수양하였으며 성리(性理)의 학문에 정밀하여 당시의 학자들이 존경하였다. 1483년(성종 14) 1월에 국왕은 이관의를 불러서 『대학』·『중용』을 강론하게 하고, 늙을 때까지 성리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여 이천 관청에서 쌀과 콩을 하사하도록 조치할 정도였다.

1471년(성종 2) 1월에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지난해 말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국왕이 함양군수로 발령낸 것이다. 김종직은 1476년(성종 7) 1월에 지승문원사로 발령되기 이전까지 5년간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영남 지역 사림들이 김종직에게 수학하였다. 정여창도 이 기간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굉필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설하면서 연마하였다. 아울러 정여창과 같은 고향인 유호인(兪好仁)·조효동·김제신과도 학문적인 교류가 있었다.

정여창의 학문에 대한 자세는 정여창이 남긴 「입지론(立志論)」 등에서 잘 드러나 있다. 정여창은 「입지론」에서 지식인의 요건으로서 무엇보다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뜻을 강하게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이를 굳게 지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뜻을 세우고 지켜 나아갈 때 사인(士人)으로서 바라는 군자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고 이해한 것이며, 이는 선(善)의 구현과 실천을 중시한 것이기도 하다.

정여창은 주자서(朱子書)의 강론을 통해 성리학을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특히 『중용』과 『예기』에 정통하였다. 정여창은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정여창은 이기설(理氣說)에서 선비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세상 만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여창의 우주론으로서의 이기설은 주자 계통의 그것을 이어받고 있지만, 우주의 본체를 이(理)에 의해서 파악하는 주리론적 이해에 가깝다. 이때 정여창의 주리론은 기(氣)와 동등하고 균형 있는 상호작용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정여창과 영남사림]

정여창의 문집인 『일두속집(一蠹續集)』 제4권 부록의 「사우문인록(師友門人錄)」에는 정여창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율정 이관의와 함께 문인 38명이 실려 있다. 이는 김일손·김굉필·남효온(南孝溫)·이심원(李深源)·이총(李摠)·조위(曺偉)·유호인·박한주·표연말(表沿沫)·양희지(楊煕止)·윤효손(尹孝孫)·박형달(朴亨達)·강혼(姜渾)·조신(曺伸)·정여해(鄭汝諧)·이수공·임대동(林大仝)·권오복·이목·허반·권경유·이원(李黿)·강겸(姜謙)·강형(姜詗)·정승조(鄭承祖)·홍한·정희량·강경서(姜景敍)·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주(李胄)·임희재·강백진·이계맹(李繼孟)·이인형(李仁亨)·노우명(盧友明)·이희증(李希曾)·고숭걸(高崇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김일손무오사화나 갑자사화에 희생된 인물들이 다수 있으며, 출신 지역으로는 박한주 등 26명 정도가 영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영남 사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16세기의 정치 변동은 사림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과정, 곧 사림 정치의 형성 과정이었다. ‘사림’은 ‘사족’·‘사류(士類)’ 등과 같이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집단’이라는 의미이다. 사림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시기는 훈구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종 대부터였다. 사림의 가계는 대체로 고려 말에 재지 이족인 토성층에서 과거·군공 또는 첨설직 등을 통하여 품관으로 신분이 상승된 재지의 지주층이었다. 사림은 탄탄한 사회 경제적 기반과 성리학적 소양을 발판으로 향촌사회의 지배기반을 구축해 갔다. 동시에 이들은 절의와 명분을 중시하여 여말의 왕조 교체기에는 낙향하였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불의로 간주하는 공통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사림의 중앙정치의 진출은 세종 대부터 일부 조짐이 있었으나 세조의 등장으로 위축되었고, 성종 대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성종 초기에 이미 김종직 등이 중앙에 진출하고 있었으나, 홍문관의 형성을 계기로 구체화되었다. 성종은 홍문관으로 하여금 경연을 담당하게 하여 그 기능을 강화하였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지방의 사림들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1478~1488년(성종 9~19)까지 홍문관에서 활동한 사림은 김맹성(金孟性)·김흔(金訢)·양희지·조위·김종직·이인형·유호인·최부 등이었고, 김심(金諶)·이인형 등이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다. 사림은 언론에 진출하면서 홍문관의 언관화와, 이를 통한 언론의 강화를 이룩하여 언론을 사림 진출의 권력기반으로 삼으려 하였다. 홍문관의 언관화 이후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직전까지 홍문관원으로 활동한 사림계 인물은 강경서·김심·권오복·김일손·이원·표연말·유호인·강겸·홍한·최부·양희지·임유겸(任由謙)·남곤(南袞)·이수공 등이었다. 이들과 함께 강백진·박한주·이계맹·이종준·이주·손중돈(孫仲暾)·유순정(柳順汀) 등은 대간으로 활동하였다.

김종직과 그의 문인인 김굉필·정여창의 교육 활동은 여러 갈래의 접촉 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접촉 계기는 친족 및 인척 관계, 동향인 또는 거주지의 근접함, 지방관 재임 시 등이었다. 이 외에 김종직이 고시관으로서 거자(擧子)와 문인 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계기나 다른 장소에서 개별적·산발적으로 사제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의식이 매우 강인하였다. 이들의 접촉은 대체로 김종직·김굉필·정여창 등 사우(師友)가 매체가 되고 구심점이 되어 이루어졌지만, 서로 직접적인 접촉이나 교류가 없었던 경우에도 서로가 매개가 되어 접촉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사림세력은 영남 사림과 기호 사림 간의 접촉이 진전됨에 따라 원래 비조직적인 사림이 ‘오당(吾黨)’, ‘경상 선배당(慶尙先輩黨)’으로 부를 정도로 조직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영남·기호를 묶는 ‘사림파’의 성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 사림파는 그 가문 배경에 있어서 비거족계 재지 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소수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전향하여 가담한 세력이었다. 사림파의 거주지는 영남 지방 출신이 49%를 웃도는 50인으로 집계되며, 나머지 타도 출신이 51%에 가까운 51인으로 집계된다. 그중에서도 기호지방 출신이 47%를 넘는 48인으로 영남 지방세에 거의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고, 특히 김굉필의 문인에 있어서는 기호계가 훨씬 우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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