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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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詩 |
영어공식명칭 | Chinese poe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정화 |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조선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한문으로 지어진 시.
[조선 전기의 한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한시는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앞선 통일신라 시대 최치원과 고려 시대 박충좌(朴忠佐) 등의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함양과 관련한 그들의 한시는 확인되지 않는다. 여말선초의 조승숙(趙承肅)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몇몇 시구가 그의 작품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이로써 이 시기 함양 인물의 한시 창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471년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그의 문인들에 의해 한시 창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김종직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문인 유호인(兪好仁)·표연말(表沿末)·정여창 등은 특히 시재(詩才)에 뛰어난 초기사림(初期士林)으로 평가된다. 그중에서도 유호인은 1490년에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직접 편찬해 임금에게 진헌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 외에도 국계리에 세거하던 진양강씨 문중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한시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들은 성종조(成宗朝)를 대표하는 관료문인으로, 훌륭한 문장을 통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 문학적 의의를 두었다. 따라서 그들의 한시에는 사대부로서의 관인적(官人的) 시각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으며, 특히 국토 인식이 높아지면서 산하에 대한 예찬이 많이 보인다.
아래는 유호인이 1472년 스승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지은 한시로, 「두류가(頭流歌)」 9수 중의 한 수이다.
천왕봉상읍군선(天王峯上揖群仙) [천왕봉에 올라서자 온갖 신선들 읍을 하더니]
수유섬삭비운연(須臾閃爍飛雲煙) [순식간에 번개가 번쩍번쩍 운무가 덮어버렸네]
부앙금고지안저(俯仰今古只眼底) [고금을 우러르고 굽어봐도 눈 아래에 있을 뿐]
일구만상공창연(一區萬象空蒼然) [한 구역의 삼라만상 부질없이 푸르기만 하네]
[조선 중기의 한시]
임진왜란을 전후한 16~17세기에는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의 문하에서 수학한 노진(盧禛)·이후백(李後白)·양희(梁喜)·강익(姜翼)·임희무(林希茂) 등 뛰어난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발전하여 문학 작품에도 이미 깊숙이 자리하던 시기인데, 이들도 예외 없이 그런 성향의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특히 노진과 강익은 실천적 수양론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아 창작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전하는 한시가 많지 않으며, 그마저도 도(道)의 근원을 찾는 성리학적 의식이 짙게 나타난다.
임진왜란 이후로도 이런 성향은 지속되었는데, 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이 대표적이다. 그는 남명의 문인 정인홍(鄭仁弘)의 제자로, 특히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무자기(毋自欺)[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공부를 중요시하였다. 또한 전란기를 체험한 지식인이라 전쟁의 참혹함과 민생의 고통 등을 한시의 소재로 사용하여 솔직한 감회를 읊어내었다.
아래는 박여량의 「『대학』을 읽다[讀大學]」라는 한시인데, 이를 통해 그의 수양론적 성향을 음미해 볼 수 있다.
종횡입덕문전로(縱橫入德門前路) [이리저리 뻗은 입덕문 앞의 여러 갈래 길들]
제일공정재일신(第一工程在日新) [제일 공부는 나날이 새롭게 하는 데 있다네]
무자기두범성계(毋自欺頭凡聖界) [‘무자기’의 끝에서 성인과 범인으로 나뉘니]
기인위귀기인인(幾人爲鬼幾人人) [몇 사람이 귀신 되고 몇 사람이 인간 되었나]
이 시기에 개평마을 정수민(鄭秀民)의 『천령지(天嶺志)』가 출간되었다. 그 속에는 적어도 1640년까지의 함양 관련 한시가 수백 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수년간 작업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문인이 지은 작품은 물론이고, 함양군수로 부임하는 이에게 준 한시 등 간접적인 작품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한시의 내용은 대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빼어난 경관과 인물에 대한 칭송이 많다.
[조선 후기 이후의 한시]
영조·정조 시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를 아우른다. 1728년 인근 안의 지역에서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의 영향으로 경상남도 함양에서도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 쇠퇴해졌다. 당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여러 가지 실험적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었으나 함양 사족과의 교유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 시기 지어진 연암의 문학 작품은 산문이 절대적으로 많으며, 한시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19세기 이후에는 대개 개평마을의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구암(懼菴) 노광무(盧光懋)[1808-1894] 등을 비롯한 풍천노씨(豊川盧氏), 미산(微山) 정환주(鄭煥周)[1833-1899] 등의 하동 정씨(河東鄭氏), 국계리의 무산(武山) 강용하(姜龍夏)[1840-1908] 등의 진양강씨(晉陽姜氏) 문중에서 문집 간행이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화림동의 누정 중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이 건립되면서 이곳은 문인들에 의해 경관을 칭송하는 많은 시가 지어졌다.
이 시기 한시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는 국난기를 타계하기 위한 일환으로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선현인 정여창이 사표(師表)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에 남계서원을 찾아가 정여창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는 한시가 많이 지어졌다. 또한 이 시기 지리산권 영남 지역에서는 남명 조식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려는 학풍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대한 일환으로 산청 덕산(德山)에 소재하는 남명유적지 유람이 성행하였고, 이를 읊은 한시가 많이 보인다.
아래 정환주가 송객정(送客亭)을 읊은 한시를 소개한다. 송객정은 남명과 덕계(德溪) 오건(吳健)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제(師弟) 간의 정을 품고 있는 유적이다.
상유노객정(上有勞客亭) [위에는 나그네를 위로하는 정자가 있고]
하유송객정(下有送客亭) [아래는 나그네를 전송하는 정자가 있네]
양현불가견(兩賢不可見) [두 분 현인을 이제는 만날 수가 없으니]
유상재차정(遺想在此亭) [그분들 자취를 상상함이 이 정자에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