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2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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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文學 |
영어공식명칭 | Chinese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56년 - 정수민, “천령지”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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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학사루길 4[운림리 31-15] |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고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한문으로 이루어진 학문 및 문학 전반을 일컫는 말.
[함양 한문학의 토대 형성]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한문학은 통일신라 시대 말기의 고운 최치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최치원은 당시 천령군수로 부임하여 상림(上林)을 조성하는 등 여러 치적을 남겼고, 그가 자주 오르내리던 관아 옆 누각을 후인들이 학사루(學士樓)라 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경상남도 함양과 관련한 최치원의 직접적인 작품은 현전하지 않는다.
고려 시대 말기에 이르러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1287-1349]가 비로소 정주학(程朱學)을 보급하였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과 함께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으며, 당시 고려의 신유학 보급 및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경상남도 함양의 인물로는 유일하게 『고려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여말선초의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1357-1417]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로 내려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포은 정몽주[1337-1392]의 문인으로 목은 이색·야은 길재 등과 절친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한문학은 이러한 역사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시대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다.
[조선 전기]
조승숙 이후부터 기묘사화(1519)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개평마을의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1413-1463]이 화려한 관력(官歷)에도 불구하고 「팔자유훈(八字遺訓)」이란 작품을 통해 가학으로 학문을 전승시켰다. 「팔자유훈」은 충주 판관으로 부임하는 큰아들에게 써준 ‘성(誠)·신(信)·염(廉)·공(公)·근(勤)·간(簡)·화(和)·혜(惠)’ 등 여덟 글자와 그 의미를 풀이한 글인데, 이후 풍천노씨가(豊川盧氏家)에서 후손을 경계하는 지침으로 전승시켰다.
이 시기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한문학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1471년 함양군수로 부임했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다. 재임기간 동안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일두 정여창·남계(灆溪) 표연말(表沿末)·임대동(林大仝)·한인효(韓仁孝) 등의 학자가 문하에 들어 수학하였고, 매계(梅溪) 조위(曺偉)·한훤당 김굉필·탁영 김일손 등 조선 초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이들과의 인연도 이때 형성되었다.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도학과 문학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함양의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이들의 학문은 중종 때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로 이어졌다. 결국 이 시기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학문이 조선 전기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호인과 조위는 경상남도 함양을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뛰어난 시재(詩才)를 인정받아 당대는 물론 후대 비평가들의 칭송을 끌어내었다.
[조선 중기]
명종·선조·인조 연간을 일컫는다. 김종직 등에 의해 형성된 학문 분위기는 무오년[1498]과 갑자년[1504]의 사화(士禍)로 잠시 위축되었다. 이것을 다시 흥기시킨 사람이 바로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1488-1547]와 그의 문도들이다. 정희보의 학문과 관련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고찰이 어렵지만 그의 문하에서 명종·선조 연간에 활동한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구졸암(九拙菴) 양희(梁喜)·개암(介庵) 강익(姜翼)·남계(灆溪) 임희무(林希茂) 등의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쟁쟁한 인사들이 배출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노진은 노숙동의 증손으로 가학으로 계승된 명체적용(明體適用)의 학문을 실천하였고, 청렴한 관직생활로 청백리의 명성을 얻었다. 강익은 정여창을 향사하는 남계서원 창건을 도모하여 함양의 선현을 선양하고 학문을 진작시킨 공적이 크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1554-1611]과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1571-1639]의 역할이 컸다. 박여량은 정희보의 손서(孫壻)인데 평생을 성리학과 『대학(大學)』 공부에 힘썼고, 전란 이후에야 벼슬에 나아가 민생회복에 노력하였다. 박명부 또한 전란기를 전후하여 일생 관직에 몸담았던 관료문인이다. 그들의 문학작품에는 전란에 궁핍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정여창의 증손인 춘수당(春睡堂) 정수민(鄭秀民)[1577-1658])이 함양의 인문지리서인 『천령지(天嶺志)』를 출간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스승이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만든 『함주지(咸州志)』에 의거해 1656년 출간하였는데, 인문지리학자로서의 높은 식견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이후]
이 시기의 함양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에 의해 다양한 실학적 정책들이 실현되었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대표적 실학자로, ‘백성의 일상적인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적 학문’이라는 뜻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 이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55세인 1791년(정조 15)에는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60세로 그만두기까지 4년 7개월 동안 수차(水車)·베틀·물레방아 등을 제작하고 활용하여 이를 실천하였다.
박지원의 문학작품은 대개 이러한 실학적 이념을 담아 사회 모순을 해학적으로 풍자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들어 있다. 특히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은 그가 함양에서 있었던 사실을 제재로 하여 쓴 소설인데, 인본주의 개혁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선행연구에서 현전하는 그의 작품은 『열하일기』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제외한 230여 편 가운데 50여 편이 안의현감 시절에 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박지원에게 있어 안의현감은 목민관으로서 민생구제에 나선 첫 관직이었고, 그만큼 경상남도 함양 일대는 연암문학의 주요 배경이었다.
19세기 이후로는 개평마을의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문중, 국계리의 진주강씨 문중에서 이름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물재(勿齋) 노광리(盧光履), 구암(懼菴) 노광무(盧光懋)[1808-1894], 미산(微山) 정환주(鄭煥周)[1833-1899], 무산(武山) 강용하(姜龍夏)[1840-1908]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한말 전후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지역 학자로서 전통유학을 계승하면서도 각 문중의 성향에 따라 현실 문제를 타계하는 실천적 학문을 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