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812 |
---|---|
한자 | 金贊彦 |
영어공식명칭 | Gim Chan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은영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9월 - 김찬언, 경남창의대장 박동의 의진에 협조하여 격문을 돌리다 일본군에 체포됨 |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9월 15일 - 김찬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8월 15일 - 김찬언,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창촌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박동의 의진 격문 전파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의병.
[가계]
김찬언(金贊彦)[?~1908]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창촌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남도 함양군의 지리산 일대에도 여러 의병부대가 항전하고 있었다. 당시 의병 운동은 지리상의 이점과 함께 지역민이 의병으로 활약하거나 의병 활동 배후 지원 세력이 되는 등 민간인의 협조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일본은 이들 의병에 대해 ‘지리산토벌대’를 편성하여 1908년 3월 5일까지 많은 의병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계속 항전한 의병 가운데 경남창의대장(慶南倡義大將) 박동의(朴東義)[1867~1908] 의진(義陣)이 있었다. 박동의 의진 또한 지역 주민 도움을 받아 1908년 9월 항일투쟁을 위한 격문(檄文)을 각 마을에 돌렸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각 마을에서도 은밀히 격문이 전해졌고,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창촌 동장 김찬언이 김순오(金順吾)[?~1908]와 함께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의평촌 동장에게서 격문을 받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 양전촌 동장에게 전달하였다. 격문 내용은 ‘세금 납부 거부, 탐관오리 징치(徵治), 일본 군경 위치의 의소(義所) 통보, 친일 세력 처단 협조와 의병 참여 호소’ 등이었다.
김찬언은 박동의 의진의 격문 내용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다른 마을에 격문을 전달하려다 일본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에 체포되었다. 수비대의 신문을 받던 김찬언은 1908년 9월 15일 일본군에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2014년 의병 항쟁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