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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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趾源 |
영어공식명칭 | Park Jiwon |
이칭/별칭 | 미중,중미,연암,연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출생 시기/일시 | 1737년 - 박지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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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89년 - 박지원, 평시서주부와 사복시주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0년 - 박지원, 의금부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791년 - 박지원, 한성부 판관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92~1796년 - 박지원, 안의현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79년 - 박지원, 면천군수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00년 - 박지원, 양양부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805년 - 박지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73년 - 박지원,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 |
출생지 | 박지원 출생지 - 서울시 중구 순화동 일대 |
부임|활동지 | 박지원 부임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
묘소|단소 | 박지원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 대세현 |
성격 | 실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반남 |
대표 관직 | 한성부 판관|안의현감|면천군수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안의현감을 지낸 실학자.
[가계]
자는 미중(美仲)·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연상(煙湘)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이다.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지금의 서울시 중구 순화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노론 명문가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1685~1760],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1703~1767]이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20대 초반에 박제가(朴齊家)[1750~1808], 유득공(柳得恭)[1748~1807] 등과 교유하였다. 집안을 돌보던 할아버지 박필균이 사망하자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지만 박지원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금강산 등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1748~1781]이 권세를 잡자 노론 벽파이던 박지원 집안은 존망조차 위태롭게 되었다.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으로 낙향하였다. 1780년(정조 4) 44세 때 삼종형 박명원(朴明源)[1725~1790]이 중국 북경으로 사행길을 나서게 되자 박명원을 따라 갔다. 당시 청나라 건륭제는 열하(熱河)에 머물고 있어서 다시 열하까지 갔다. 그때 느낀 감회를 정리한 것이 박지원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열하에서 돌아온 후 박지원은 서구 문물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면서 노론 내의 동료들을 모았다. 1786년(정조 10) 50세 때 음보(蔭補)[조상 덕으로 벼슬을 얻는 것 또는 덕으로 얻은 벼슬]로 관직에 나가 선공감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1787년 정조의 명을 받아 춘추관 기주관으로 『송자대전』 편수에 참여하였다. 1789년(정조 13) 평시서주부 및 사복시주부에 임명되었다가 1790년(정조 14)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고, 1792년 1월에 부임하여 5년여 동안 안의현감으로 재직했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때 갖가지 기이한 행적으로 유명하였다. 죽은 친구들을 위하여 대숲 그윽한 곳에 술·고기·생선 등 성대한 술상을 차리도록 하여서 슬픈 표정으로 한동안 앉아 있다가 음식을 아전(衙前)과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안의현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과 시경연을 하여서 사족들을 욕보이기도 하였다. 안의현의 2층으로 된 창고를 헐어 연못을 만들어서 동료들을 불러 연회를 열곤 하였다. 이 소식은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안의현사직단신우기(安義縣社稷壇神宇記)」, 「안의현여단신우기(安義縣厲壇神宇記)」, 「학사루기(學士樓記)」, 「흥학재기(興學齋記)」 등 다수의 글을 지었다.
한편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으면서 아전들의 비위를 철저히 감독하여 6만 석이나 되는 횡령 곡식을 환수하였다. 박지원은 감영에서 해결하지 못한 100여 건의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는 등 송사(訟事) 문제에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현감으로서 박지원은 흉년이 들면 자신도 죽을 먹는 등 백성들과 동고동락하였다.
1792년 정조가 문체 타락을 개탄하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행하였다. 이때 문체 타락의 대표 사례로 『열하일기』가 지목되자 정조는 남공철(南公轍)[1760~1840]을 다시 보내 통해 순정문(醇正文)으로 지을 것을 명하였다. 박지원은 남공철에게 속죄하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고, 정조는 답서를 보고 문장에 감탄하였다. 1796년 지방관 임기 만료로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한성부로 상경하자 제용감주부과 의금부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1797년(정조 21년) 61세 나이로 면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800년(정조 24) 8월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었으나 정조가 사망하자 은퇴하였다. 1803년(순조 3) 중풍으로 몸이 마비되었다가 1805년(순조 5) 10월 20일 한성부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연행 기록인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대표작이며, 정조의 명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였다. 그 외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 다수의 문학작품을 저술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북학파 대표 학자로서 문체를 자유롭게 구사하였으며, 서구 문물 도입을 적극 주장하였다. 박지원의 저술은 문집 『연암집(燕巖集)』에 전한다.
[묘소]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73년에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追贈)되었다. 1910년(순종 4)에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