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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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馹孫 |
영어공식명칭 | Gim Ilson |
이칭/별칭 | 계운,탁영,소미산인,문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출생 시기/일시 | 1464년 2월 13일(음력 1월 7일) - 김일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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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86년 - 김일손, 생원에 수석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498년 8월 14일(음력 7월 27일) - 김일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18년 - 김일손, 자계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649년 - 김일손, 도동서원에 배향 |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현산현 토평리 백곡마을 |
거주|이주지 | 청계정사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69-1 |
수학|강학지 | 청계정사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669-1 |
사당|배향지 | 자계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
사당|배향지 | 도동서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서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관직|경력 | 승정원주서|홍문관수찬|병조좌랑|이조좌랑|홍문관교리|이조정랑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거주한 문신.
[개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정여창(鄭汝昌)[1450~1504]과 함께 다니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을 흐르는 남계(蘫溪)의 빼어난 주변 자연경관을 좋아하였다.
[가계]
김일손의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김일손의 가계는 경상북도 청도에서 세거(世居)하였다.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 부친은 집의(執義) 김맹(金孟)[1410~1483]이다. 어머니는 이씨이다.
[활동 사항]
17세 때까지 할아버지 김극일에게 전수받고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뒤 1487년(성종 18) 진주향교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어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師事)[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 주서(注書), 홍문관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 홍문관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김일손은 관료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서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면서 학문과 문장 깊이를 다졌다.
김일손은 정여창과의 두터운 친교뿐만 아니라 친형 김준손(金駿孫)[1454~1508]이 한동안 함양군수로 재임하였고 어머니도 경상남도 함양에 와서 거처하고 있어 자주 방문하였다. 정여창과의 학문 교류는 청계정사(靑溪精舍)를 건립하여 본격화되었다. 김일손은 경상남도 함양에서 사색과 독서 등을 하는 동시에 신병을 요양하면서 만 14세 연상인 정여창과의 친교가 두터워졌다. 경상남도 함양에서 김일손이 체포되어 압송되던 당일도 정여창이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질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하지만 사초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확인되듯 김일손의 정치 입장은 정여창과 동일하지 않았다. 김일손은 재상 중심 지배 체제이자 제도로는 의정부서사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다. 그리고 「회로당기(會老堂記)」, 「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사초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관이던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조선 시대에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둔 사기(史記)의 초고]에 실은 것이 노사신, 한치형, 윤필상, 신수근,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사초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일손은 1498년 7월 27일 형장으로 끌려나가 정오 일각에 능지처참되었다.
[상훈과 추모]
중종 대에 복관되어 직제학(直提學), 현종 대에 도승지, 순조 대에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1518년(중종 13) 경상북도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과 1649년(인조 27) 충청남도 천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921년 김일손이 공부하던 청계정사 자리에 청계서원(淸溪書院)이 준공되면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