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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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宗直 |
영어공식명칭 | Gim Jongjik |
이칭/별칭 | 계온,효관,점필재,문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출생 시기/일시 | 1431년 - 김종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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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9년 - 김종직,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62년 - 김종직, 승문원박사·예문관봉교 겸임 |
활동 시기/일시 | 1468년 - 김종직, 함양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75년 - 김종직, 중직대부를 거쳐 경상남도 함양에서 향교를 진흥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로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76년 - 김종직, 선산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482년 - 김종직,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92년 - 김종직 사망 |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
거주|이주지 | 추원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추원재길 58[제대리 701] |
외가|처가 | 김종직 외가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
묘소|단소 | 대동고택 뒷산 - 조선시대 밀양 대동리 대동고택 뒷산 |
사당|배향지 | 백연서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
사당|배향지 | 예림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
사당|배향지 | 금오서원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동 |
사당|배향지 | 경렴서원 - 경상북도 김천시 하리안길 19-6[양천동 830] |
사당|배향지 | 덕림서원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면 대신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선산 |
대표 관직 | 함양군수|승정원도승지|이조참판|홍문관제학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군수로 재임한 문신이자 영남사림파를 대표하는 유학자.
[가계]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고려말 선산의 이족(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김숙자(金叔滋)[1389~1456]이다. 모친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1373~1419]의 딸이다. 김종직은 20세 때인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자 자기 문인인 조위(曺偉)[1454~1503]의 누나와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인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은 하였지만 태학사(太學士) 김수온(金守溫)[1410~1481]의 주목을 받아 왕에게 알려져서 영산훈도(靈山訓導)를 명받았다. 28세 때 세조 조에 등과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성종 초에 39세로 함양군수에 재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경상남도 함양에서 학교를 진흥시킨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에 입각한 향촌 질서 수립에 주력하였다.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 여러 제자를 양성하였다.
1482년(성종 13)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에 임명되었다. 그 후 예문관직제학,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이어서 이조참판과 홍문관제학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경연에도 참여하였다.
[학문과 저술]
아버지 김숙자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김숙자는 여말선초 재야에서 후학 양성에 몰두한 길재(吉再)[1353~1419]의 제자였다.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학통을 모두 계승하여 영남사림파를 형성하고 영수가 되었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많은 글이 불태워졌으나 현재 『점필재집』, 「유두류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저서로 남아 있다. 김종직이 편찬한 경상도 선산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의 읍지 『일선지(一善誌)』와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 기록을 모아 편집 간행한 「이존록(彝尊錄)」 등이 있다.
[묘소]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밀양부의 서쪽 무량원(無量院) 건좌(乾坐)에 안장되었으나 그 후 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 복권되면서 김종직의 유체(遺體)를 모아 밀양부의 서쪽 대동고택[지금의 추원재로 추측] 뒷산에 개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중종반정으로 신원된 후 경상남도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과 경상북도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 금오서원(金烏書院), 김천 경렴서원(景濂書院)과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