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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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億年 |
영어공식명칭 | Lee Eoknyeon |
이칭/별칭 | 이영,인여,요산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신은제 |
출생 시기/일시 | 1266년 - 이억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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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285년 - 이억년, 문과 급제 |
추모 시기/일시 | 1635년 - 이억년, 안봉영당에 배향 |
거주|이주지 | 이억년 거주지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
부임|활동지 | 이억년 부임지 - 개성 |
묘소|단소 | 이억년 묘소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
사당|배향지 | 안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자산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주 |
대표 관직 | 개성부유수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한 문신.
[가계]
이억년은 고려 후기 세족가문인 성주(星州) 이씨이다. 이억년의 처음 이름은 이영(李永),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돈문(李敦文), 할아버지는 이득희(李得禧)이다.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던 옛 부명]의 향리를 지낸 이장경(李長庚)이다. 어머니는 합천군부인 이씨이다. 이억년의 동생이 이조년(李兆年)[1269~1343)이다.
[활동 사항]
1285년(충렬왕 11)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충렬왕 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부임하였다. 『고려사』 선거지에 따르면 1285년 4월에 과거가 있었으며, 이 과거는 판비서사 안전(安戩)[?~1298]이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억년의 과거 급제 기록은 조선 후기의 비명과 족보에 전하고 있어 추가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이후 이억년은 함양으로 낙향하여 당시 원나라가 국정에 간섭하는 등 관여하자 원나라의 개입을 항의하는 시를 남겼다고 전하여진다. “생각지도 않은 10년의 벼슬살이[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 어디메쯤 홀로 머물까[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
이억년의 낙향은 충렬왕과 충선왕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298년(충렬왕 24) 이후 고려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울 때 이조년은 충렬왕 측에 가담하고 이후 충선왕이 권력을 잡자 유배되었는데 이억년 역시 이때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억년은 경상남도 함양군 위성(渭城) 엄천리(嚴川里)[지금의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로 들어가 서당인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었다.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촌 장항(獐項)내 임좌(壬坐)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자산동에 있는 안봉영당(安峯影堂)[지금의 안산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