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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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李氏 |
영어공식명칭 | Seongju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광철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34년 - 이지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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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 시기/일시 | 고려 후기 - 성주이씨, 이억년 함양에 입향 |
입향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성주이씨, 이지활 함양에 입향 |
본관 | 성주 - 경상북도 성주군 |
입향지 | 이지활 -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양백리 |
세거|집성지 | 화촌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화촌리 |
세거|집성지 | 중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
세거|집성지 | 송평리 -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
성씨 시조 | 이순유 |
입향 시조 | 이억년|이지활 |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이순유를 시조로 하고 이억년, 이지활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신라 말 인물 이순유(李純由)를 시조로 삼는다. 이순유 이후 2·3·4대는 누락되었다. 5대부터 이범(李凡), 이정거(李廷居), 이충경(李冲京), 이영(李瑩), 이효삼(李孝參), 이돈문(李敦文), 이득희(李得喜), 이장경(李長庚)으로 내려오면서 호장(戶長)[고을 구실아치의 우두머리]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주이씨는 이장경이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1266~?], 이조년(李兆年)[1269~1343] 등 다섯 아들과 1녀를 낳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면서 고려 말에 이르러 가세가 신장되고 문벌로 성장하였다.
성주이씨 가문에서는 고려 후기에 들어와 고려 말까지 관료를 집중 배출하였다. 이조년은 충렬왕 때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길에 나가 충혜왕 때까지 활동하면서 군부판서(軍簿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이조년의 아들 이포(李褒)[?~1373]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아들 이인복(李仁復)[1308~1374], 이인임(李仁任)[?~1388], 이인미(李仁美), 이인립(李仁立), 이인민(李仁敏) 등은 정승을 비롯하여 고위직에 올라 가세를 신장시켰다.
[입향 경위]
1956년 함양향교에서 간행한 『함양군지』 성씨조에서는 역대 함양의 입향조에 해당하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유림면의 첫 인물로 성주이씨 이억년을 기록하고 있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이억년은 고려 충혜왕 때 경상북도 성주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그 자손들이 화촌(花村)[유림면 화촌리]과 휴천(休川)에 거주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성주이씨 함양 입향의 최초 인물은 이억년이 된다.
조선 건국 후에는 단종 때 이장경의 후예 이지활(李智活)[1434~?]이 세 아들과 함께 성주로부터 함양으로 들어와 고을 서쪽 백전(栢田)[백전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큰 아들 이문현(李文賢)은 함양박씨 박흥택(朴興澤)의 사위가 되어 송평(松坪)[병곡면 송평리 송평마을]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영조 때에는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1654~1714]의 후손 이우철(李佑哲)이 충청도 단성(丹城)[충청북도 단양군 단양면]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교산(校山)[함양읍 교산리]에 정착하였으며, 순조 때에는 이민실(李敏實)[1772~1840]이 고을 북쪽 개평(介坪)[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서 살다가 나중에 다시 성주로 들어갔다.
[현황]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성주이씨는 전국에 5만 8,134가구 18만 6,188명, 함양군에는 175가구 43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조사에서는 전국에 20만 3,703명, 함양군에는 29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에 비해 전국은 성주이씨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반면에 함양군은 40여 명 감소하고 있다. 함양군 내 성주이씨 주요 분포 지역은 유림면 화촌리 화촌마을, 안의면 도림리 중동마을, 병곡면 송평리와 덕평리 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