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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조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721
한자 咸安趙氏
영어공식명칭 Haman Jo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고려 후기 - 함안조씨, 조경이 덕곡마을에 입향
본관 함안 - 경상남도 함안군
입향지 덕곡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곡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효산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계곡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마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마산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마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귀곡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조정
입향 시조 조경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조정을 시조로 하고 조경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함안조씨(咸安趙氏) 시조 조정(趙鼎)은 고려조에서 원윤(元尹) 벼슬을 하였다. 조정의 후손이 함안에 정착하여 대대로 세거하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삼았다. 조정 이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는 조간(趙幹)-조단석(趙丹碩)으로 이어지고, 조단석은 아들 조시우(趙時雨)와 조영준(趙英俊) 두 가계로 나누어져 번성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조시우의 가계는 조시우-조석화(趙錫和)-조열(趙烈)-조희(趙禧)-조지흥(趙之興)-조윤방(趙允邦)으로 내려오고, 조지흥은 조인계(趙仁啓)·조천계(趙天啓)·조신계(趙信啓) 세 아들을 두었다. 조영준의 가계는 조영준-조극복(趙克復)-조대승(趙大升)[1185~?]-조백균(趙百鈞)[1235~?]-조호(趙灝)-조수전(趙秀佺)-조경(趙璥)으로 계승되었다.

고려 시대에 벼슬한 것으로 확인되는 함안조씨 인물로는 조이(趙彝), 조열(趙悅), 조승숙(趙承肅)[1357~1417] 3명 정도이다. 조이는 일찍이 중이 되었으나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이는 원나라에 가서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일본을 회유하는 데 고려를 앞세울 것을 종용하여 고려의 처지를 곤란하게 한 바 있다. 조열은 공민왕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면서 이색(李穡)[1328~1396]·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과 교유(交遊)[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하였고, 고려 말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안으로 낙향하였다. 조승숙은 1377년(우왕 3) 과거에 합격하여 부여 감무로 활동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함양에 은거하였다.

[입향 경위]

함양군에 입향한 함안조씨 인물은 형부상서를 지냈다고 하는 조영준의 후손 조경이다. 조경은 우왕 때 함양 고을 북쪽의 덕곡(德谷)[지곡면 덕암리 덕곡마을]에 정착하였다. 조선 고종 때 조성구(趙性九)는 함안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공배(功倍)[지곡면 공배리 공배마을]에 거주하였다. 입향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종한(趙宗漢)은 함안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서상면 추천(楸川)[서상면 금당리 추하마을]에서 살았고, 조성삼(趙性三)도 함안에서 들어와 서상면 영각(靈覺)[서상면 상남리]에 자리 잡았다. 조문상(趙文祥)과 그 자손들은 서상면 방지(芳池)[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조여(趙旅)[1420~1489]의 16세손 조취만(趙就萬)은 함안에서 들어와 서상면 금당(金塘)[서상면 금당리]에 정착하였다.

『천령지』 인물조에는 조경의 함양 입향 후 배출한 인물로 조승숙, 조종례(趙從禮)[1376~?], 조효동(趙孝同)과 조광립(趙光立)·조광헌(趙光獻)·조광덕(趙光徳)·조광건(趙光建)·조광성(趙光成) 5형제 등을 소개하고 있다. 조승숙은 정몽주의 문인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었고, 1391년(공양왕 3) 부여감무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이며, 함양의 도곡(道谷)서원에 봉향되었다.

조종례는 조승숙의 아들이다. 26세 되던 1402년(태종 2)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조효동은 조승숙의 증손으로,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司諫)을 지내었으며, 성종 때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학행을 들어 천거하였다. 조광립 5형제는 조승숙의 후손으로,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는 와중에 왜적이 들이닥치자 어머니를 에워싸고 보호하려다 모두 해를 당했다.

[현황]

경상남도 함양군의 함안조씨는 지곡면 보산리 효산마을, 마산리 계곡마을과 마산마을에 세거해 왔다. 함양군 안의면 귀곡리 귀곡마을도 16세기 경부터 함안조씨에 의하여 터가 잡혔다. 2000년도 기준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함안조씨가 전국에 8만 1,048가구 25만 9,196명, 함양군에 217가구 56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는 전국이 28만 2,890명, 함양군이 477명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조사에 비하여 함양조씨 전국은 증가한 반면에 함양 지역은 약 90명 줄어든 셈이다.

[관련 유적]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교수정(敎授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1983년 7월 20일 지정]은 조승숙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1398년(태조 7)에 지은 정자이다. 조승숙은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성종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사제문을 내렸으며,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라는 여덟 자를 자연 암반 위에 새겨 거북 머리를 조각하고 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320㎝, 폭 90㎝, 두께 39㎝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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