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719 |
---|---|
한자 | 豊川盧氏 |
영어공식명칭 | Pungcheon Roh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광철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403년 - 노숙동 출생 |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63년 - 노숙동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풍천노씨, 노숙동이 함양 개평에 입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4년 7월 4일 - 함양 노진 신도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2년 7월 12일 -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0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3월 18일 - 함양 풍천노씨대종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3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5년 1월 15일 - 풍천노씨 가학십도 목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6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5년 1월 15일 - 노숙동 송재실기 목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7호로 지정 |
본관 | 풍천 - 황해도 풍천 |
입향지 | 개평리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
세거|집성지 | 옥동마을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옥매리 |
성씨 시조 | 노수 |
입향 시조 | 노숙동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노수를 시조, 노숙동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연원]
풍천노씨의 본관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은 옛 지명이다. 고구려 때는 구을현(仇乙縣) 또는 굴천(屈遷)이었다. 757년(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 풍주(豊州)로 이름을 바꾸고 995년(성종 14)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강등되고 방어사(防御使)가 설치되었다. 1395년(태조 6) 진(鎭)이 설치되고 병마사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하였으며,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되었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었다.
풍천노씨의 시조는 중국 범양(范陽) 사람으로, 당(唐)나라 때 한림학사를 지낸 노수(盧穗)로 알려져 있다. 노수는 당나라 말년 선종(宣宗) 때 아홉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아홉 아들이 모두 등과하여 고려 초년에 봉읍(封邑)됨으로써 풍천(豐川) 등 9개 본관으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노수의 아들 중 셋째 노지(盧址)는 고려시대 풍천백(豊川伯)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후손 중 고려시대에 국자 진사(國子進士)를 역임한 노유(盧裕)가 풍천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노지를 득관조(得貫祖), 노유를 1세조(一世祖)로 각각 하고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를 이어 왔다. 노유 이후 풍천노씨 세계는 노장용(盧藏用)·노준(盧俊)·노정(盧貞)·노서린(盧瑞麟)·노덕린(盧德麟)으로 이어지고, 노서린의 네 아들 노천보(盧天輔)·노천계(盧天桂)·노천수(盧天壽)·노천익(盧天益) 가운데 노천계의 가계가 노흥길(盧興吉)·노언(盧焉)·노백동(盧伯仝)·노숙동(盧叔仝)[1403~1463]·노계동(盧季仝)으로 내려오면서 가문의 번성을 가져왔다.
[입향 경위]
함양 지역 풍천노씨 입향조는 노숙동이다. 노숙동은 참판으로 증직된 노언의 둘째 아들로, 세종조에 창원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고을 북쪽 개평(介坪)[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에 정착하였다. 노숙동이 창원에서 함양으로 이주하게 되는 것은 혼인 관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동정씨 정여창의 할아버지 죽당 정복주(鄭復周)[1367~?]는 노숙동의 처외조부였고 경주김씨 김점(金點)은 그의 장인이었다. 하동정씨가 먼저 개평에 들어왔고, 김점은 정복주의 사위가 되어 역시 개평에 정착하였으며, 이제 김점의 사위인 노숙동이 개평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노숙동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세종대에서 세조대까지 예문제학, 대사헌, 호조·형조·예조참판, 동지중추원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覧)』, 『고려사』 등 사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풍천노씨의 함양 입향은 조선 후기에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통덕랑 노륜(盧腀)의 후손 노달수(盧達壽)는 정조조에 하동에서 들어와 촉동(燭洞)[마천면 구양리 촉동마을]에 거주하였고, 고종조에 문효공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후손인 노지현(盧址鉉)이 고성(固城)에서 들어와 그 자손들이 내마(內馬)[마천면 덕전리 내마마을]에 정착하였다. 함양으로 입향한 풍천노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656년에 편찬한 함양군 읍지 『천령지(天嶺誌)』 인물조에는 풍천노씨 출신이 19명이나 실려 있다. 이들은 모두 노숙동의 후예이다.
[현황]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의 성』에서 함양군의 풍천노씨는 함양면 교산리·대덕리에 24세대, 지곡면 개평리에 32세대, 지곡면 평촌리에 35세대, 유림면 옥매리에 53세대 규모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유림면 옥매리 옥동마을은 풍천노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전체 가구수 90호 가운데 풍천노씨가 40호 정도이다. 이 외에 풍천노씨가 살고 있는 마을은 여러 곳이다. 함양읍 대덕리 죽장마을, 수동면 도북리 도북마을, 지곡면 보산리 효산마을, 지곡면 덕암리 덕암마을, 지곡면 평촌리 주곡마을과 상개평마을, 지곡면 개평리 오평마을, 백전면 오천리 음천마을 등은 풍천노씨의 주요 분포지이다.
2000년의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풍천노씨의 전국 인구는 1만 2,183가구 3만 9,397명, 함양군은 481가구 1,099명이었다. 2015년 통계에서는 풍천노씨가 전국이 4만 5,200명, 함양군이 867명이었다. 2000년 조사에 비하여 풍천노씨의 전국 인구가 6,000명 가까이 증가하였으나 함양군은 오히려 230여 명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풍천노씨 인구에서 함양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2% 정도로 여전히 높은 편이다.
[관련 유적]
함양 노진 신도비(咸陽盧禛神道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1994년 7월 4일]는 조선 중기 문신 옥계 노진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거북등의 비좌(碑座)에는 정교한 조각을 두었고, 머릿돌에는 구름 속의 6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짓고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글을 새겼다.
함양 평촌리 신고당 신도비 및 부부 묘표(咸陽坪村里信古堂神道碑及夫婦墓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0호, 2012년 7월 12일]는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 32에 있다. 신도비는 옥계 노진의 신도비와 같은 영역(瑩域)의 상부에, 남향으로 안장된 신고당 노우명(盧友明)[1471~1523] 부부의 쌍분 묘체(墓砌) 바로 아래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향으로 서 있다. 묘표는 각각의 분묘 정면에 남향으로 서 있다. 그 밖에 풍천노씨 관련 지정 문화재로 함양 풍천노씨 대종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3호, 2004년 3월 18일], 풍천노씨 가학십도 목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6호, 2015년 1월 15일], 노숙동 송재실기 목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87호, 2015년 1일 15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