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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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川先生遺集 |
영어공식명칭 | Baekcheonseonsaengyujip |
이칭/별칭 | 『백천유집』,『백천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진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201[반포동 산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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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집 |
저자 | 강응황 |
권책 | 1책[불분권] |
행자 | 10행 21자 |
규격 | 32.4×20.5㎝ |
어미 | 상일엽하이엽화문어미 |
권수제 | 백천선생유집 |
판심제 | 백천유집시|백천유집소|백천유집제문|백천유집장절목|백천유집상절목|백천유집만|백천유집묘지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유학자 강응황의 문집.
[저자]
윤석(尹晳)이 지은 묘지(墓誌)에 따르면 강응황(姜應璜)의 생년은 가정(嘉靖) 신미년(1571), 졸년은 숭정(崇禎) 갑신년(1644)이다. 자는 위서(渭瑞), 호는 백천(白川)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아버지는 사복시 판관을 지낸 강칭(姜偁)[1544~1597]이다. 어머니는 진양하씨로, 별검 하춘년(河春年)[1522~?]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 능라도(綾羅島)를 공격할 적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1534~1602]을 도와 계책을 내었다. 동몽교관,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상례(喪禮)를 물었다. 노형필(盧亨弼), 조희보(趙希輔)[1553~1622], 이언영(李彦英)[1568~1639] 등과 교유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백천선생유집(白川先生遺集)』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경위를 알 수 없다.
[형태/서지]
권을 나누지 않은 1책의 목활자본이다. 전체 크기는 32.4×20.5㎝이고, 반곽은 23.0×16.3㎝이다. 사주단변이고, 행마다 경계가 있다. 10행에 각 행은 21자이고, 주는 쌍행이며, 상일엽하이엽화문어미이다.
[구성/내용]
시는 모두 203수가 있다. 대개 벼슬할 때와 물러났을 때 교유한 인물들과 수창(酬唱)[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한 것이다. 이어 사헌부 감찰을 사직하는 상소가 있다. 제문으로는 경상남도 함양 출신 유학자 정여창(鄭汝昌)[1450~1504]과 노진(盧禛)[1518~1578] 등의 위패를 봉안하는 고유문(告由文)[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글]이 있다. 또 정구에게 질의한 상례 절목 및 후인들의 만사가 실려 있다. 강응황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윤석이 지은 「묘지」가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백천선생유집』은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의 유학자 강응황의 시문집이다. 강응황의 생애와 문학 사상,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 17세기 초 함양 지역 유학자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