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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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泉里遺蹟 |
영어공식명칭 | Remains of Sincheon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천리 28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주용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1년 6월 14일~2011년 8월 31일 - 신천리 유적,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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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신천리 유적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천리 281 |
성격 | 유적 |
면적 | 2,142㎡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신천리에 있는 통일 신라시대 말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건물지 유적.
[개설]
2011년 6월 14일부터 2011년 8월 31일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함양 본백-용평 간 4차로 확장공사와 관련하여 구제 발굴조사 한 유적으로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신천리 유적이 발견되었다.
[건립 경위]
함양 본백-용평 간 4차로 확장공사를 위해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를 하다가 확인되었다. 시굴과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삼국시대 수혈유구 10기, 토기가마, 수혈유구 27기, 고려~조선시대 건물지 11기, 우물 2기, 도로유구 1기 그리고 매장유구와 생산유구 등이 확인되어 ‘함양 신관리 유적’으로 명명된 바 있다. 이후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추가 편입된 도로구간에 대해 발굴조사 한 결과 고려~조선시대 건물지 9동, 보도유구 1기, 석축 1기, 수혈 6기, 구상유구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 행정구역상 함양 신천리에 있어 ‘함양 신천리 유적’으로 명명되었다. 우리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함양 신관리 유적’과는 북서쪽에서 연접한다.
[위치]
신천리 유적은 함양군 함양읍 신천리 28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함양읍 북쪽의 백암산[521.4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저구릉성 평지에 해당한다. 남쪽을 제외한 유적 주변을 산지가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 백운산[1,279m]에서 발원한 위천이 서에서 동으로 곡류하고 있다. 유적은 위천을 따라 형성된 넓은 평탄지로 2018년 기준 최근까지 농경지로 이용되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남쪽의 지리산과 북쪽의 덕유산 사이로 영호남을 잇는 주요한 위치에 해당한다. 신천리 유적은 도로망의 중심에 있어, 사람의 이동이나 물자의 수송이 용이한 교통로에 있다. 신천리 유적에서 북쪽으로 약 300m에 함양고읍성이 있어 본 유적은 고읍성과 관련이 있는 시설인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신천리 유적은 기단석렬이 잔존하는 건물지 6동과 적심만 잔존하는 건물지 3동, 그외 보도유구 및 배수로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지의 주축 방향은 주로 남향과 동향이다. 규모는 정면 1~3칸 이상, 측변 1~3칸 이하이다. 주칸[柱間] 거리는 정면 200~420㎝, 측면 150~420㎝로 확인된다. 건물지는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자연석기단 내부에 적심을 설치하여 상부 건축물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유적 내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함께 청자편, 토기편, 진단구인 편병과 철환 등이 수습되었다. 출토 유물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와는 나말여초의 기와가 상당수를 차지하며, 조선시대 기와도 일부 확인된다. 문양은 크게 어골문, 선문, 격자문 등이 확인된다. 귀목문 수막새와 ‘官’, ‘郡’, ‘夫’ 또는 ‘天’으로 해독되는 명문기와도 출토되었다. 어골문, 선문, 격자문 등의 문양이 있는 유물과 명문기와 유물로 보아 신천리 유적은 통일신라시대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축, 개축,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심 연대는 고려시대로 판단된다.
[현황]
신천리 유적 건물지의 규모 및 배치 형태와 ‘관(官)’, ‘군(郡)’자 명문기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후기에 읍성 주변의 마을에 속한 관청 같은 공적인 건물이나 지방사회의 유력자의 거처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신천리 유적은 함양군의 고려시대의 건축 기술이나 마을의 공간 활용 등의 사회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