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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444
한자 咸陽黃石山城
영어공식명칭 Hamyang Hwangseogsanse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산 153-2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안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 - 함양 황석산성, 은하건축사사무소에서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7년 - 함양 황석산성, 두류문화연구원에서 조사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3년~2002년 - 함양 황석산성의 남문지, 동문지, 동북문지 주변 선벽적 정비
문화재 지정 일시 1987년 9월 18일연표보기 - 함양 황석산성, 사적 제32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함양 황석산성, 사적으로 재지정
현 소재지 함양 황석산성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산 153-2 지도보기
성격 산성
양식 포곡식 석축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3,034m
면적 446,186㎡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있는 고려시대 복합식 산성.

[개설]

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는데, 1410년(태종 10) 『태종실록』 2월 29일 기사에 ‘경상도, 전라도 여러 고을의 산성을 수축하였다. 창녕현의 화왕산, 감음현(感陰縣)의 황석산(黃石山)……’라고 나와 있으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지도서』에는 ‘이 산성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이후에 못쓰게 되었으나 손질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정유왜란[1597] 때에 현감 존재 곽준이 용감하게 의병을 일으켜서 자신이 몸소 돌을 져다 날라 성과 방어도구를 손질하였다.’고 나온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황석산석성(黃石山石城)은 현 서쪽 25리에 있다.[둘레가 1천 87보105]인데 안에 시내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고, 함양 군창에서도 아울러 들여다 둔다’고 했다. 그 뒤 성종 때에는 ‘조위가 황석산 성중에 간직한 곡식 70석을 가까운 성으로 옮겨 두게 하기를 청하였다’라 하고 있으므로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 경위]

함양 황석산성은 고려시대 입보용(入保用)산성으로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성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위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산 153-2에 있다. 이곳은 함양군과 거창군과 상당히 이격된 지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입보용산성의 입지와 유사하다.

[형태]

함양 황석산성의 평면 형태는 남쪽이 오목한 삼각형에 가깝고, 서벽 중앙에 지성을 축조하였다. 세부적으로 황석산[1,190m]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능선의 커다란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석축산성이며, 자성은 서벽 중앙에서 서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전체 면적은 446,186㎡이다.

[현황]

함양 황석산성은 1992년 은하건축사사무소에 의해 지표조사와 약식시굴조사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의 규모와 축조수법이 확인되었고, 부속시설로는 남문·동문·동북문·군창지 등이 확인되었다. 선행된 조사를 바탕으로 1993년부터 2002년까지 8차례에 걸쳐 남문지, 동문지, 동북문지 주변에 대한 선벽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1987년 9월 18일 사적 제32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함양 황석산성의 성벽은 사면부를 의지하여 축조하였으며 전형적인 산탁의 형태이므로 삼국시대에 비해 높이와 폭이 낮고 좁다. 그리고 북동벽은 암반 사이에는 부분적으로 협축한 부분도 확인된다. 성벽은 능선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20~30cm 정도의 활석(割石)으로 1.5~3m 정도의 높이로 들여 쌓기를 하였다. 성문은 3곳에서 확인되며, 개거식(開据式)으로 주변에서 기와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문루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는 곡부를 따라 곳곳에 그 흔적이 확연하며 그 주변에 집수지도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의와 평가]

함양 황석산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입보용산성으로 경상남도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성곽을 찾기 어려우므로 고려시대의 다른 지역 입보용산성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실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주 전투장소였던 성문 주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전쟁고고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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