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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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陽地域-鬪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동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8년 - 함양지역 빨치산 투쟁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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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 함양지역 빨치산 투쟁 종결 |
발단 시기/일시 | 1948년 10월 19일 - 여순사건 |
발생|시작 장소 | 지리산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
발생|시작 장소 | 백운산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
성격 | 빨치산 활동 |
관련 인물/단체 | 하준수|김지회|홍순석 |
[정의]
해방 이후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벌어진 빨치산 활동.
[역사적 배경]
함양 지역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입산한 세력과 인민위원회 활동을 벌이다가 입산한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와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일을 말한다. 이에 1948년 10월 20일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회의를 열어 진압작전을 위해 광주광역시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은 진압작전을 시작했고, 봉기군인 14연대는 지리산 방면으로 탈출하여 이후 빨치산이 되었다.
[경과]
19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이 발생한 후 패배한 군인들 1,000여 명이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입산하였다.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와 홍순석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근거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운산 일대에 분산시켜 장기항전을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된 세력은 함양 지역 외에 구례·곡성·광양·무주·장수·남원·거창·산청·진주·하동 등지에도 출몰했다.
『조선일보』(1948. 12. 22.) 기사에 의하면 “12월 19일 함양 마천지서에 지리산 도피 반도(叛徒) 30여 명이 내습하여 경비 중인 다수 경관을 죽이고, 내부에 침입한 다음 집무 중인 경사와 순경 등 4명을 사살하였다”고 하였다. 『함양군지』에서는 “1949년 3월 여순사건의 두목인 김지회, 홍순석이 지휘하는 500여 명의 지리산 공비가 덕유산으로 이동하여 거창 일대에 만행을 저질렀다…23일에는 차량 2대를 강탈하여 북상지서와 위천지서 등에 아군을 사칭하여 식료품의 보급을 징발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마천향토지』에는 여순사건과 관련된 빨치산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12월 19일 김지회와 홍순석이 마천면으로 왔는데 국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하던 경찰관 3~4명을 사살하고, 연초조합 직원 등 6명을 사살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빨치산의 활동으로 마천면 주민들도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토벌군경들은 빨치산이 은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연마을을 강제 소개(疏開) 후 불을 질렀다. 마천면과 휴천면에서 불탄 가옥은 총 251호였다.
인민위원회 활동을 벌이다가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이 된 세력이 있었다. 하준수가 대표적이다. 하준수는 해방 이후 경찰과의 갈등 속에서 해방 이전에 활동했던 덕유산 은신골로 1946년 여름에 재입산했다. 하준수를 비롯한 빨치산은 함양군의 투쟁을 주도했는데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통한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1947년 ‘함양 7.27인민대회’,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2.7함양투쟁[구국투쟁]’, 5·10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천왕봉 무장봉기’ 등이었다.
5·10총선거 이후 하준수를 중심으로 한 빨치산 활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친일경찰 등을 응징하기 위하여 함양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빨치산이 활동한 곳은 지리산이 주무대였고 덕유산·백운산·장안산·괘관산 등이었다. 군경의 빨치산 토벌 작전은 지리산 산간부락의 소개를 통해 빨치산의 거점과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함양군의 산간마을을 소개하거나 통비분자 색출을 명분으로 마을 주민들을 연행하고 취조하여 빨치산과 협력한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불법적으로 사살하기도 했다. 산간마을 소개는 1950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빨치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육군본부는 1948년 10월 30일 호남 방면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 달간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1949년 3월 1일에는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편되었다. 3월 29일에는 안의면 근방에서 빨치산이 출현했다는 첩보를 받고 90여 명을 사살했다. 군경은 빨치산이 괘관산[지리산과 덕유산 사이]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괘관산에서 지리산으로 연결된 통로의 길목인 운봉면 피바위 고개를 차단하였고, 100여 명의 빨치산을 타격했다. 그리고 1949년 9월 28일부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여 1949년 10월 30일부터 1950년 2월 28일까지 민심수습·사상선도·농촌재건 촉진·원호사업을 병행한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결과]
빨치산 투쟁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1949년 4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비정규 군인과 군대 등이 ‘공비소탕’이라는 이름 아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1949년 4월부터 마산18연대·서북청년단원이 주축인 호림부대, 백호·비호부대 등이 경상남도 전역에서 토벌을 실시했다. 경상남도 산청군과 함양군을 비롯한 지리산 인근에서만 수백 명이 공비로 몰려 집단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