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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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義防禦戰 |
영어공식명칭 | Anui Defens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지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7월 24일 - 함양·안의전투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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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7월 29일 - 함양·안의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 |
종결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미24사단 19연대|미24사단 29연대|조선인민군 4사단|민기식 부대|김성은 부대|오덕준 부대 |
[정의]
1950년 7월 24일부터 7월 29일까지 한국전쟁 중에 미 24사단 및 국군 공동작전으로 전개된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지역 방어전투.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5일경 육십령 고개를 넘어 함양군으로 진격해 왔다. 서남부 지역으로 진격한 북한군 4사단[사단장 이권무]이 안의와 하동 지역에 도달하자 미 8군 사령관[W.H. 워커 중장]은 미 24사단 34연대를 경상남도 거창으로, 19연대[연대장 Ned D. 무어 대령]를 함양군 안의와 경상남도 진주로 급파하였다. 7월 25일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채병덕 소장을 영남서부지구 방위사령관에 임명하여 민기식 부대·김성은 부대[해병대]·전남지구편성관구 산하 이응준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 결과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태세를 갖춘 민기식 부대와 미 24사단 19연대 병력이 함양군 안의면 일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경과]
7월 27일 북한군 제4사단이 장계~안의 도로에 주력군을 투입하여 육십령 고개를 넘어오자 접근로에 배치되었던 대규모의 경찰 혼성부대가 북한군 제4사단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우세한 적에게 밀려 안의 지역으로 분산 철수하여 장계~안의 간 통로가 북한군에게 뚫리게 된다.
함양초등학교에 지휘소를 설치한 민기식 부대는 즉시 오덕준 부대와 김성은 부대를 투입하여 안의 방어에 나섰고, 미 19연대 1대대 A중대와 연합하여 안의 서부~남북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오덕준 부대는 안의 서쪽 2㎞ 지점 468고지에, 김성은 부대는 421고지에 각각 주둔하여 강력한 화력으로 북한군 정찰대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7월 27일 오후 5시경 북한군이 아군 부대 고지에 야포와 직사화력 등을 증강하여 공세를 강화하자 오덕준 부대와 김성은 부대는 진지 방어에 실패하였고 함양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미 19연대 A중대의 진지(陣地)를 인수한 미 29연대 1대대 B중대는 악전고투 끝에 18명[장교 2인, 부사관, 사병 16인]만이 경상남도 거창으로 철수하고 나머지 215명[D중대 일부 포함]은 전사하였다. 안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북한군의 공세는 동쪽으로 거창, 남과 서쪽으로는 함양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민기식 부대장은 연락이 두절된 오덕준 부대와 미군의 구출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북한군에 의해 차단되었고, 해병대를 수습하여 함양 동쪽 6㎞ 지점인 수동면 화산리로 병력을 철수하였다.
민기식 부대장과 미 29연대 1대대장은 협의 끝에 병력 손실을 최대한 막는 것에 주력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7월 27일 저녁 8시 40분경에 병력을 산청으로 철수하고 오덕준 부대 200명을 진주까지 철수토록 하였다. 거창을 방어하던 미 34연대는 13야포대대로 방어전에 나섰으나 중대를 잃고 1대대와 3대대를 거창 동쪽으로 철수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후 후방의 포진까지 적의 공격을 받은 34연대는 거창에서 합천까지 철수하게 된다. 함양군 지곡면 새미마을에 부대를 배치하였던 김성은 부대의 제1·2중대는 7월 28일 오후 3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을 집중한 결과 20여 명을 사살하는 등 수차례 북한군의 공격에 대응하였으나, 이미 북한군이 함양군 서남쪽 2㎞까지 진출한 데다 계속된 전투에 피로가 누적되고 병력 손실이 많아 산청까지 후퇴하였다.
[결과]
7월 28일 민기식 부대장의 지휘하에 오덕준 부대·김성은 부대·해병대가 함양을 철수한 뒤 화산리 부근 수동 지역에서의 방어 역시 우세한 적군의 공격에 밀려 7월 29일에 산청을 지나 진주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구찰 방면으로부터 침입한 북한군 제6사단은 하동을 약취한 뒤에 연이어 원전[진주 서쪽 22㎞]을 거쳐 진주를 목표로 삼았다. 이에 미 제19연대는 배속받은 미 제29연대 3대대의 잔존병력과 합세하여 진주 일대의 방어에 임하였다. 따라서 민기식 부대는 계속 김성은 부대를 지휘하여 당일 진주 북쪽 산청가도에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김성은 부대는 30일에 미군에 배속되어 남강 남쪽 방어선을 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함양·안의 방어전은 한국전쟁 중에 거창·함양·진주 등 서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육군과 미 24사단의 연합작전으로 방어전을 전개하였으나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함양·안의 방어선을 지키지 못하였고 연합군은 진주 남강 이남 방어로 전열을 재정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