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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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戊午士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1498년 7월에 사관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함으로 인해 발생한 사화.
[개설]
김일손은 함양군 출신인 정여창과 두터운 교유 관계를 유지하였다. 1498년(연산군 4) 7월에 함양군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면서 한 달여간 무오사화가 진행되었다. 무오사화의 발단은 김일손이 사초에 등재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작성한 「조의제문」의 글과 연관된다.
[역사적 배경]
무오사화는 15세기 중반 이후 활발하게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재야의 사림세력과 기존의 집권 훈구파들의 갈등과 대립관계가 「조의제문」을 계기로 구체화된 사건이다. 『연산군일기』의 관련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사림 출신의 김일손이 집권 관료들인 이극돈과 유자광 등의 비행을 사초에 기록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극돈 등이 사초의 기록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고, 김일손이 시정을 거절하자 원한의 감정을 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을 제거할 구실을 찾는 과정에서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조의제문」을 발견하고, 연산군이 발췌한 사초의 해당 부분들을 검토하면서 사건이 비화되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애도하는 내용이었는데,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던 것을 비난했던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경과]
1498년(연산군 4) 7월 1일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등이 왕에게 비밀사안을 보고하자, 의금부의 경력(經歷) 홍사호(洪士灝)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이 왕명을 받들어 경상도로 급히 파견되었다. 당시 호조정랑이었던 김일손은 어머니 초상을 마치고, 1498년 6월에 함양군의 정여창을 방문하여 함께 청계정사(靑溪精舍)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두선생유집』에서는 7월 1일 서울에서 파견된 의금부 관리에 의해 7월 5일에 김일손이 사초사안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면서 헤어졌다고 전한다. 김일손이 체포될 때 정여창이 “사류(士流)에 대한 화(禍)가 이로부터 시작되는구나”라고 말하자, 김일손은 “이것은 반드시 이극돈(李克墩)이 사초의 사실을 발설한 것이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백욱(伯勗)[정여창]은 자애(自愛)하여 조심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정여창도 “여러 말 하지 마라. 나도 또한 이 일로 붙들려 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7월 11일에 처음으로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7월 12일에 김일손이 압송되어 오자,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 조의 일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사실대로 말하라” 며 문초가 시작되었다. 심문이 진행되었고 연루자들에 대한 체포와 심문도 이어졌으며, 그 결과에 따라 7월 27일 관련자들에 대한 처결이 있었다.
[결과]
1498년 7월 27일의 처결을 보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김일손 등은 능지처사(凌遲處死), 이목 등은 참(斬)하였다. 나머지 관련자로서 정여창·표연말·김굉필 등 19명은 유배 등으로 차등 있게 처벌하고, 이극돈 등 8명은 파직·좌천되면서 총 33명이 공식적으로 처벌되었다.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은 모두 포상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의제문」이 사초에 등재되면서 전개되고 사화의 시작을 열었던 무오사화는 집권 훈구세력들이 함양군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정여창, 정여창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김일손, 정여창과 김일손의 스승이자 함양군수를 역임했던 김종직 등 사림계열의 인물들에게 타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동시에 김일손과 같은 사림 출신 관료들의 관료지배체제의 국정운영 실현이라는 그들의 정치적 신념을 반영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