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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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공식명칭 | Cloth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신라,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양하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전해지는 의생활.
[개설]
함양군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 의상인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계절에 따라 신분에 따라 입는 옷이 달랐다. 혼례 때 입는 옷도 따로 있었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두발과 복장은 서양식으로 바뀌어 현재는 명절 때나 예복으로 입는다.
[연원 및 변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는 “(부여인들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북사」와 「수서」의 ‘신라조’에는 “복색에서 흰빛을 숭상한다”고 되어 있다. 정결하고 순박한 흰색 옷을 즐겨 입는 것이 전통 의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구려시대에는 몽골의 영향을 받아 몽골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예복의 개혁이 있었으나 흰옷을 입는 풍속은 개화기까지 이어져 왔다. 개화기 이후 일본식 복장과 서양식 복장이 자리 잡게 되면서 흰옷을 입는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흰색의 한복은 계절에 따라 옷감의 종류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입는 옷은 백옥같이 다듬이질하였다 하여 ‘진솔옷’이라 하고, 삼복염천인 여름에 시원하게 입는 옷은 ‘박음옷’이라고 하였다. 또 한겨울에 따뜻하게 솜을 넣어 입는 옷은 ‘핫옷’, 봄가을에 입는 옷은 ‘접옷’, 늦은 봄에 입는 옷은 ‘홑옷’이라 하였다.
함양 지역에서도 전통적으로 목화와 삼, 누에고치를 원료로 한 흰색 옷감으로 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성 의복은 바지,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 도포, 토시, 버선, 대님, 행건[복인이나 상제가 쓰는 두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토시는 1950년대부터 사라져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오늘날 팔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기 위해 작업용으로 끼거나 여름철 햇볕으로 피부가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끼는 용도로 바뀌었다. 도포는 양반층에서 제사 때만 착용할 뿐 대중화되지 않았으며, 행건은 상복을 입을 때만 사용하게 되었다. 여성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저고리는 끝동과 깃, 고름에 장식이 있는 것이 기본이다. 이보다 화려한 저고리는 저고리 끝에 자주색이나 담홍색의 단을 달아 금박 무늬를 넣은 삼회장저고리나 반회장저고리가 있다. 여기에 청홍치마를 받쳐 입었는데 치마를 더욱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 스란치마[조선시대 궁중에서 예복으로 입던 스란단을 부착한 치마]를 받쳐 입기도 하였다. 여성복은 저고리, 치마, 배자, 단속곳, 장옷, 적삼, 버선, 속적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옷은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쓰개였다. 그러다가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두루마기는 처음에 남성 전용이었으나 근래에 와서 남녀 공용이 되었다. 외씨버선은 예쁜 발 모양을 내기 위해 되도록 볼을 좁혀서 신던 풍속이 있었으나 위생상 문제로 점점 폭이 넓어졌다.
함양군에서는 특히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림복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함양 지역 사림은 전통적인 의복을 지켜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포를 입고 술띠를 두르고 행건을 치며 유건[유생들이 도포, 창의에 쓰던 검은 베로 만든 실내용 관모]을 썼다. 심의[유학자들이 입던 겉옷]에 행건을 치고 복건[머리에 쓰는 관모의 하나]을 쓰기도 하였다. 근년에 와서도 도포에 행건을 치고 갓을 쓰고 유건 차림을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사림조차도 특별한 행사에만 입는 옷이 되었다.
[의복의 구분]
평상복은 일상생활에서 입는 옷을 말한다. 양반 계층이 입던 옷이 아니라 평민들의 옷으로 볼 수 있다. 서민들은 중치막을 입고 행전(行纏)[한복의 바지나 고의를 입을 때 움직임을 가볍게 하려고 바짓가랑이를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치고 술띠[허리띠나 주머니끈 따위로 쓰이던 양쪽 끝에 술을 단 가느다란 띠]를 두르고 갓을 썼다. 중치막은 넓은 소매에 길이가 길고 앞은 두 자락으로, 뒤는 한 자락인데 앞이 터져 있는 옷이다. 천민들은 포의를 입지도 못하고 관모도 쓰지 못하였다. 짐승의 털을 두껍게 다져서 만든 벙거지를 썼다.
승려의 복장은 불교가 전해 오면서 편삼과 가사가 전래되었다. 남승과 여승의 복장에는 차이가 없었으며, 모두 회색 옷을 입었다. 승려의 평상복은 속옷과 바지를 입고 버선을 신고 대님을 치며, 허리띠를 두른 뒤 행전을 치기도 한다. 저고리 위에는 동방이라는 상의를 입었으며, 상의는 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승려의 관모로는 검은 베로 둥글게 만든 승관이 있고, 굴갓·고깔·대삿갓·송화 등을 썼다. 등에는 바랑을 짊어지고, 손과 목에는 염주를 건 채 목탁을 들고 다녔다.
혼례복은 남자는 한복을 입고 사모관대를 하였으며, 신부는 한복 차림에다 원삼과 족두리를 썼다. 신부의 머리는 쪽 진 큰 낭자에 다래[가채]를 곁들어서 용잠[비녀]을 꽂고, 큰 댕기를 드리웠다. 혼례복은 원래 궁중이나 사대부의 예복이었으나 평민들도 경사스러운 혼례에는 이런 옷을 입도록 하였다.
상복의 경우 복을 입는 것도 촌수에 따라 엄격하게 따졌다. 부모의 상을 당하면 ‘짓것’이라 하여 씻지 않은 짓광목으로 된 옷을 입고, 그 위에 마포로 된 중단을 입고 행전을 치며, 그 위에 다시 상복을 입었다. 허리에는 요질을 띠고 머리에는 두건과 굴건을 쓰며, 또 수질[상복을 갖추어 입을 때 관 위에 쓰는 것]을 쓰고 상장을 짚고 짚신을 신었다. 여자 상주 역시 상복 차림을 하고 흰 족두리를 쓰며, 흰 댕기를 드리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의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남자는 단발을 하게 되면서 머리에 쓰는 것이 없어졌으며, 옷도 서양식 양복을 입게 되었다. 신발은 고무신이나 운동화로 바뀌었다. 여성복에서도 일상복이나 노동복이 일본식 복장 형태로 바뀌어 갔다. 여성복은 남성복에 비해 시대와 유행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자유롭게 바뀌면서 전통적인 옷차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