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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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공식명칭 | Pre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 |
집필자 | 윤호필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인류 출현부터 문자로 역사기록을 남기기 이전까지의 시기.
[개설]
선사시대는 역사시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역사를 기록한 문헌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선사시대는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를 포괄해서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러한 시대구분법은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센(C. J. Thomsen)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톰센은 인류의 발달과정을 도구사용의 기준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세 시대로 구분하였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문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는 통칭 ‘석기시대’로 불리며, 돌을 주 도구로 사용한 시대이다. 구석기시대는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인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였는데,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약 250만 년 전 무렵이다. 시기구분은 ‘석기 제작 기술’에 따라 전기[약 250만~10만 년 전], 중기[약 10만~4만 년 전], 후기[약 4만~1만 년 전]로 구분된다. 타제석기는 주먹도끼 같은 큰 몸돌석기에서 박편을 2차 가공하여 만든 박편석기(剝片石器)에서 보다 작고 정교하게 떼어낸 돌날석기로 변해간다. 당시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수렵과 채집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동성 생활을 하였다. 함양군에는 아직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지역인 진주·산청·거창 등지에 구석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구석기인들의 이동성으로 볼 때, 함양군에도 구석기시대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신석기시대는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인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한 시기로 약 기원전 1만~1,500년 무렵까지이다. 신석시시대 인류는 주로 해안이나 강가를 중심으로 움집을 짓고 살면서 마제석기와 더불어 새롭게 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 초기는 여전히 수렵과 어로, 채집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신석기시대 중기부터는 초기 농경도 일부 시작되었다. 이에 정주취락도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주요 유구는 주거지, 수혈, 야외노지, 무덤, 조개더미[패총(貝塚)], 유물포함층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그물추·낚싯바늘·석촉(石鏃)[돌로 만든 화살촉]·창·보습[삽 모양의 연장]·석부(石斧)[돌도끼]·갈돌[절굿공이 구실을 한 분말용 석기]·갈판[곡물이나 야생열매를 부수어서 가루로 만드는 데 사용하는 석기]·골각기 등이 있다.
함양군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화산리 유적, 손곡리 유적, 하원리 유적 3곳뿐이며, 대체적으로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말기의 유적들이다. 이 중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하원리 유적으로 수혈유구 6기, 구상유구 1기, 야외노지 2기, 집석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따라서 아직 함양군의 신석기문화를 파악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서부 경상남도 내륙지역의 신석기문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는 금속재를 도구재료로 사용한 시대로 발달된 도구를 바탕으로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문화현상이 나타난다. 청동기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금속을 도구재료로 사용한 시대로서 청동기는 구리에 비소 3%나 주석 10% 정도를 섞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1,500년~기원전 300년 무렵으로 청동도구 이 외에 간석기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은 크게 전기·중기·후기의 3단계로 나누어지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대규모 마을의 형성, 성숙한 농경활동, 대규모 경작지 조성, 고인돌의 축조, 거석기념물 축조, 의례 활동의 증가 등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함양군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10곳 정도가 확인되며 대부분이 유물산포지, 고인돌, 선돌 등이다. 취락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생활유물과 신안리유적에서 발굴조사된 주거지 1기를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대부분이 구릉사면과 강변 충적층에 입지한다. 무덤은 고인돌과 석관묘가 조사되었다. 고인돌은 화산리 고인돌과 손곡리 고인돌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 중 화산리 1호 고인돌은 묘역의 규모[길이 29m, 폭 6.6m 정도]가 이 일대에서 가장 크다. 이 외에 거석기념물로는 선돌[입석(立石)]이 3곳 정도 확인되었다. 이렇듯 함양군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강변과 구릉에 취락을 형성하고 농경을 중심으로 대형지석묘와 거석기념물을 축조하면서 다양한 삶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철기시대는 인류가 새로운 금속인 철(鐵)을 이용하여 철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시대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중국 전국시대 철기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300년경에 성립되어 고대국가의 기틀이 시작되기 이전인 기원전 100년까지를 말한다.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양상은 주조철기문화,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 점토띠토기문화[점토대토기문화(粘土帶土器文化)], 온돌주거지문화, 널무덤[목곽묘(木棺墓)]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함양군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유구가 확인된 곳이 없어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며, 일부 발굴조사 과정에서 단편적으로 유물이 확인되었다. 백천리 유적에서 채집된 유물은 원형 점토대토기 구연부편 2점, 조합우각형 파수 1점, 두형 토기 대각편 1점으로 소략하다. 하지만 백천리 유적 일대에 초기철기시대의 취락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내륙 지역에 있기 때문에 해안 지역 초기철기시대 유적들과의 상호 교류와 관련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