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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40
한자 忠臣
영어의미역 Faithful subject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현규

[정의]

광명 지역 출신이거나 광명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신하.

[개설]

광명 지역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충신으로는 광명시 소하2동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에 모셔진 고려시대의 강감찬(姜邯贊)[948~1031], 서견(徐甄)과 조선시대의 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들 수 있다. 충현서원은 1658년(효종 9) 처음 건립되었는데, 삼현사(三賢祠)라 하여 세 사람의 위패를 향사해 오다가, 1676년(숙종 2) 사액되면서 충현서원으로 개칭되었다.

[광명의 충신]

강감찬은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이다.

서견은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고려 말 1391년(공양왕 3)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어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다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장류(杖流)되었다. 조선 개국 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은거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원익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피난하였던 공로가 인정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 가는 데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린 공신 칭호]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삼현사기]

충현서원이 처음 건립되던 1658년 9월에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지은 『기언(記言)』 권16에 「삼현사기(三賢祠記)」가 전하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금천현(衿川縣) 한천(寒泉)에 삼현사가 있다. 삼현사란 고려 강태사(姜太師)[이름은 감찬], 서장령(徐掌令)[이름은 견]과 우리 선조 때 공신 완평(完平)[이원익의 봉호] 이상국(李相國)의 사당이다. 태사는 문종과 현종을 섬겼는데,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사직단(社稷壇)을 닦고 방구(方丘)[지신(地神)에게 제사하는 단]와 감단(坎壇)[땅을 우벼 낸 곳을 감(坎), 쌓은 곳을 단(壇)이라 하는데, 감에서는 한신(寒神), 단에서는 서신(署神)에게 제사함]의 제도를 설정하였으며, 백관의 직제를 개편하였다.

거란이 침입하자, 군신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여 속수무책으로 항복하려 하였으나 태사는 정색을 하고 예와 의로써 고수하였다. 의리가 밝으면 사람들이 기꺼이 심복하고, 사람들이 기꺼이 심복할 때 국가는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마침내 거란을 이기자 왕은 탄복하며 예의를 지킴으로써 온 나라가 오랑캐로 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충신의 공이라며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특진시켰다. 다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사가 되었고,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죽으니 시호를 인헌(仁憲)이라 하였다. 사적이 『고려사(高麗史)』 본전에 실려 있다.

서장령은 고려 말기를 당하여 위태함을 보고도 피하지 않다가, 익양군(益陽君)[성종의 여덟 번째 아들 이회(李懷)]이 세상을 뜬 후에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서인(庶人)이 되었다. 고려가 멸망할 때 금천에 살면서 의리상 고국을 잊지 못하여 북을 향해 앉지 않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한양 성곽을 바라보지 않았다. 물(物)을 두고 시를 읊으면 혼자 슬퍼하였는데, 어떤 이는 ‘견이 노래하며 반란을 도모하니 마땅히 처벌을 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견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유(類)이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선조 때에 와서 재상 윤근수(尹根壽)가 왕에게 아뢰어 충신총(忠臣塚)에 봉하였다.

이상국은 선조를 섬겼는데, 국가가 전란을 당하자 목숨을 바쳐 사직을 보존하였다. 평안도순찰사로 있을 때는 그곳 백성들이 생제(生祭)[감사나 수령의 덕행과 선정을 사모하여 생존 중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는 일]로 공에 보답하였고, 남방(南方)에 개부(開府)[순찰사나 체찰사 등 어느 한 지방을 통할하는 벼슬아치를 높여서 하는 말. 여기에서는 1595년(선조 28) 우의정겸제도체찰사로 영남과 호남을 순시하였을 때를 말함]하였을 때는 남방 백성들이 신명처럼 신뢰하였다.

광해군이 무도해서 사람의 기강을 무너뜨려 없애자, 상국은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피해를 받아야 한다’면서 간(諫)하기는 하되 버리고 떠나지는 않았는데, 광해군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소외시켜 축출하였다. 그러나 상국의 말에 힘입어서 인심이 더욱 밝혀졌으니, 이것이 천리(天理)이다. 1623년(인조 1) 다시 중흥 정승이 되었다. 국가 안위를 담당하고 국가를 돌본 지 40년, 88세로 세상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상국은 세 왕조를 보좌하면서 치체(治體)와 유술(儒術)은 존중히 여기고, 절약과 검소를 좋아하였으며, 진퇴의 의가 밝아 사방 인심이 쏠리니 선조와 인조의 회복명신이라고 일컬어졌다. 이상의 훌륭한 세 분은 어짊이 백세의 제사를 받아 마땅하다. 하물며 사전(祀典)에 “법이 백성에게 베풀어졌거나, 목숨 걸고 맡은 일에 충실하였거나, 노력으로 나라를 편하게 하였으면 제사한다”라고 했다.

오늘날 봉천(奉天)을 강태사마을이라 하고, 또 그가 태어날 때 상서로 운석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이 읍에서 북으로 10리 밖 번당(燔塘)[현 성남고등학교 자리]에 서장령의 묘가 있고, 연성(連城) 접경 오리동(梧里洞)에 이상국 집안의 묘지가 있다. 당초에 상국이 이 고장 부로(父老)들과 상의하여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 하다가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시 25년 후에 고장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상국도 함께 봉향(奉享)하고 ‘삼현사’라 이름하였다. 사우를 세운 해는 금상(今上)[효종]이 즉위 9년째인 무술년(1658)이다. 같은 해 9월 상완(上浣)에 공암(孔巖) 허목이 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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