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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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京里 |
영어의미역 | Jagyeongni Village |
이칭/별칭 | 사겨우리,좌경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수 |
[정의]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자경리(自京里)는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서울의 경계로 이제부터 서울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자경리는 옛 시흥군 영역이었고, 당시 시흥군과 서울의 경계 지역은 서울 한강이 되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광산김씨 대종중 정묘보[1747]와 병자보[1876]에는 성채산이 공경 받는 선비인 김원록(金元禄)·김대덕(金大徳)·김대성(金大城) 삼부자를 모신 곳이라 하여 사경산(士敬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세월이 지나면서 사경이 자경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관악산이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 즉 서울의 남쪽에 있는 불산이어서 재앙이 이곳까지 미치게 되므로 성채산에 개가 앉아 있는 형상을 조각하여 관악산과 마주보게 하여 화기를 막아 마을의 무사를 기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마을을 사견우리(四犬隅里), 석견우리(石犬隅里), 좌견리(座犬里)라 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자경리(自警里)로 바뀐 데 이어 다시 자경리(自京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시흥읍지』에는 자경리(自警里), 광산김씨 직장공파 족보에는 자경리(自敬里)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경(京)’자는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자경리는 광산김씨 직장공파 후손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이래 전주이씨 광평대군파와 양녕대군파 후손들이 세거해 온 마을이다. 조선 말기 시흥군 서면 자경리였고, 1914년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 속하였다. 1964년 시흥군 서면 일직1리에 속하였고, 1981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광명시 일직동에 속하였다. 행정상으로는 광명시 소하2동 9통이다. 자경리는 광복 직후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948년경 시흥군청에 근무하던 김희철과 청년운동가 심정구가 주축이 되어 만든 자경 4-H구락부는 마을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자경 4-H구락부는 안양의 명학 4-H구락부, 수촌 4-H구락부, 수원의 정자 4-H구락부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4-H구락부로 알려져 있다.
[자연환경]
성채산 남쪽 자락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은 마을로 동·남·북이 훤히 트여 있다. 남쪽 지역을 웃말, 북쪽 지역을 아랫말이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밤나무 숲이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현황]
자경리는 소하동 데부뚝마을과 안양시 만안구 석수3동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마을을 관통하여 웃말과 아랫말로 나누어져 있다. 마을 옆으로 KTX 광명역이 있고, 역사 인근에 개설된 서독로가 마을과 자경리 저수지 사이를 지난다. 자경리 저수지는 역사를 지으면서 예전보다 규모가 줄어들었다. 마을 앞으로 2차선 도로인 사경길이 새로 놓여 웃말과 아랫말을 이어 주고 있고, 마을 입구에 자경리새마을회관, 마을 안쪽에 두손실업·유원 등의 조립식 공장이 들어서 있다. 마을 앞 사경길을 따라 펼쳐진 경작지는 밭농사와 하우스 재배로 이용되고 있다. 웃말에는 자경저온고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덕안, 데부뚝마을, 궁촌, 새터말[일직동] 주민들과 함께 성채산 중턱에서 산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산중턱에 있는 수령 100여 년 된 향나무 앞에서 지내다가 제2경인고속도로 공사로 바위 밑으로 옮겼다. 마을 주산인 성채산은 광산김씨 사패지로 광산김씨 묘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