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리
-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도로·철도 등의 기반 시설을 표시한 약도. 재질은 한지이며, 도면 크기는 가로 79.7㎝, 세로 52.4㎝이다. 전체적으로 도로와 철도 그리고 수계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주요 특징이다. 부군계(府郡界), 국도(國道), 면계(面界), 삼등 도로(三等道路), 도로, 하천, 철도, 정거장, 군청, 동리(洞里), 면사무소, 우편국, 경찰...
-
1932년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가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 8개 리의 역사와 문화 등을 조사하여 간행한 향토지. 『서면향토지(西面鄕土誌)』는 시흥군 최초의 초등학교인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서면초등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가 당시 시흥군 서면의 소하리, 하안리, 철산리, 광명리, 노온사리, 가학리, 박달리, 일직리 등 8개 이(里)의 향토사를 조사하여 발간한 향토...
-
다음에 소개하는 두 분은 외지에서 설월리로 시집와서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사신 분들이다. 설월리의 여느 주민들처럼 이분들은 농사일을 하며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이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생동감 있는 설월리의 지난 세월을 들여다보자. 설순금[1921년생] 씨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가마를 타고 이곳 설월리로 시집을 왔다. 와서 보니 시부모와 남편이 살...
-
설월리에서는 1927년에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서면초등학교]가 개교하여 근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 성인들 중에도 문맹자가 많았다. 1920~1930년대에 걸쳐 광명 지역에서는 문맹 퇴치를 위한 계몽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28년 1월...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경기도 광명 지역에 실시한 대규모 임야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식민지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전국 임야의 소유권을 재확정하고자 추진한 사업으로, 1916년 시험적인 준비 조사를 거쳐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조사와 측량 등을 마쳤다. 이에 부수하는 심의 처리 등의 사무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주관으로 1919년에 개...
-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후에 만든 광명 지역의 토지조사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는 1910년 3월 15일 칙령 제23호에 따라 1910년 8월 24일 법률 제7호로 「토지 조사법」을 공포했다. 이후 1912년 8월 13일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로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고, 위 법령에 의거하여 전국적으로 ‘토지조사부’가 만들어졌다....
-
광명리 사람들 이야기는 광명시 개청의 모태가 된 광명동 지역과 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었다. 광명리의 도시개발과 그에 따른 변화는 이후 전개되는 광명의 여러 지역의 도시화의 기본 모델이기 때문이다. 광명시의 도시화는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자연마을이 조금씩 확대되면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 아니다. 서울특별시의 주택과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울특별시의 택지개발계획에...
-
대한민국 경기도 중서부에 있는 시. 광명시는 한반도 중부에 있는 기초자치단체로 경기도 중서부에 자리한다. 북쪽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과 천왕동, 구로동, 동쪽으로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과 시흥동, 남동쪽과 남서쪽은 경기도 안양시, 시흥시와 접한다. 광명시의 동단인 소하1동과 서단인 옥길동 사이 거리는 6.55㎞, 북단인 철산1동과 남단인 가학동 사이 거리는 10.32㎞이다....
-
광명시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소하2동은 소하동 일부 및 일직동으로 이루어진 동이다. 면적은 7.2㎢로, 광명시 전체의 18.7%에 이르는 도·농 복합 지역으로, 전체 면적 중 69.4%가 그린벨트 등으로 다양한 행정 수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1981년 광명시 탄생에 이르기까지 설월리는 옛 시흥군 서면의 행정 중심지로 번성했던 소하리의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
경기도 광명시의 주산은 높이 237m의 구름산이다. 광명시의 중앙에 자리 잡고 광명시를 동서로 가르는 구름산은 아왕봉 또는 운봉(雲峰)으로도 불렸다. 바로 이 구름산의 서쪽에서부터 동쪽까지의 줄기를 타고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이 터를 잡고 뜻을 펼쳤는데, 그들이 바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소현세자의 빈인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1611~1646], 경...
-
시인 기형도(奇亨度)는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면[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에 딸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4년 일가족이 시흥군 소하리[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6-1번지]로 이사하였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였으며,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다. 기형도는 돼지 치는 집 막내아들로...
-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지형지물의 위로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인공 구조물. 광명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량은 시흥대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흥대교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총독부고시 제219호이다. 그 내용은 "조선하천령 제11조의규정에 의해 좌기의 토지를 안양천(소하리 내 시흥교 이하 한강의 합류점에 이르는 구간)의 하천구역으로 인정한다...." 이다. 그러나 총독부 기록의 시흥...
-
경기도 광명시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행위. 조선의 유교 중심 교육은 1870년대 외국과 수교 관계를 맺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외국의 새로운 제도 및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 문화를 이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근대식 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외국인들은 통변학교·광혜원 등을 세워 외국어와 서양 의학을 가르쳤...
-
1971년 7월 30일 「도시계획법」이 제정되면서 시흥군 소하읍이 개발 제한 구역[그린벨트]으로 지정되자 소하리는 자동으로 그린벨트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지난 40여 년간 설월리 일대는 건축물의 신축이나·증축, 용도 변경, 토지의 형질 변경 및 토지 분할 등의 행위가 엄격히 제한 당했다. 당연히 설월리 주민들은 불편한 주거 환경과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을 주...
-
6·25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설월리 일대 사람들은 여전히 논농사를 생업으로 꾸려 나가고 있었다. 현재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선 자리는 ‘멍석뜰’이라 불리던 논자리로, 구름산과 도고산에서 내려오는 한내와 한강으로 흘러드는 안양천이 자리하고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렇다고 설월리 사람들이 논농사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다. 부농도 있었지만 대부분...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소하사거리에서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기아대교에 연결되는 도로. 광명시 소하2동 오리로의 소하사거리에서 동쪽 방향의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남쪽을 지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기아대교에 이르는 도로이다.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1동]에 건설된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의 진입로이므로 기아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아로는 연장 1.43㎞, 폭 25...
-
기아산업은 1970년 11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국내 최초의 대단위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소하리공장은 영등포와 부산, 시흥에 이은 네 번째 공장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소하리공장은 자동차 생산을 위한 최초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아산업은 창업 이래 영등포, 부산, 시흥 공장을 거치면서 약 30년 동안 자전거와 2륜 오토바이, 3륜...
-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시청사거리에서 철산3동 안현초등학교 삼거리에 연결되는 도로. 광명시 철산3동 시청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철산4동주민센타와 광덕초등학교를 지나 철산3동 안현초등학교 삼거리를 종점으로 하는 도로이다. 도덕산 도시자연공원이 가까이 있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여 도덕공원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덕공원로는 연장 964m, 폭 11m, 왕복 2차선 도로이다. 철산동의 토...
-
충청북도 제천이 고향인 정운하[1959년생] 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0년에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서울로 올라와 철산리, 지금의 광명시청 건너편 철산주유소 자리에 정착했다. 당시 그곳에는 정운하 씨 집을 비롯해 20여 가구가 무허가 땅에 벽돌로 집을 짓고 옹기종기 붙어살았다. 정운하 씨 아버지는 광명사거리에서 동그마니[곡식을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서 만든 넓...
-
광명 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이 처음 일어난 시기는 3월 27일이다. 당시 서면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던 이정석(李貞石)이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선동하다가 28일 아침 출동한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자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서면 지역 주민들이 이정석을 구출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서 3월 28일 200여 명이 참가...
-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을 위해 경기도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운동가들. 대한제국기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광명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과 항일 운동이 부단하게 전개되었다. 광명지역에서는 여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하였다. 1866년 시흥군 서면 철두리에서 태어난 장원겸(張元謙)은 충청남도 직산군 일대에서 길찬범(吉贊範) 의병...
-
경기도 광명시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시설. 문화시설은 예술인이 문화·예술을 행할 수 있는 장소인 동시에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일체의 시설을 말한다. 문화시설에는 「도서관법」상 도서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상 박물관 및 미술관, 문예회관, 문화예술회관과 「지방문화원진흥법」상 지방 문화원, 문화의 집 등이 있다. 광명 지역의 공공 도서관은...
-
경기도 금천현·시흥현·시흥군에 있던 행정구역. 서면은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 전역에 해당하던 지역이다. 1914년 남면과 통합하기 이전에는 경기도 광명시의 법정동인 철산동·소하동·하안동·일직동 지역에 해당하고, 남면과 통합한 이후에는 경기도 광명시의 법정동인 광명동·가학동·노온사동을 포함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금천현(衿川縣)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면이라고 하였다. 서면은 고려시대 금...
-
1914년부터 1979년 이전까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지역에 있던 면사무소. 현 광명시 소하2동은 1979년 이전까지 경기도 시흥군 서면이라는 행정 구역이었는데, 서면사무소는 서면 지역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이었다. 서면사무소가 생기면서 이 지역에는 취락이 발달하였고,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광명시의 첫 교육 기관인 서...
-
설월리는 광명시의 진산인 구름산을 등지고 그 앞으로 안양천이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설월리 주민들은 소하동 너른 벌판을 일구며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곳은 또 예전부터 안산과 시흥 사람들이 서울에 가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산세와 부족하지 않은 물자가 생산되어 제법 큰...
-
경기도 광명시에 속하는 법정동. 소하동은 개발 제한 구역이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도농 복합 지역이며 최근 소하1동은 소하택지개발사업과 신촌마을 주거지환경개선사업으로 신시가지로 변모 중이다.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현내면의 아랫동네이므로 소하라 하였다. 소하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해 금...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과 소하동 일부를 관할하는 행정동.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현내면의 아랫동네이므로 소하라 하였다. 소하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해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두 달 뒤 과천을 다시 설치하면서 금천과 양천(陽川)을 병합해 금양현(衿陽縣)이 되었고, 1416년(태종 16) 경기...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을 관할하는 행정동.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현내면의 아랫동네이므로 소하라 하였다. 소하동은 고려시대 금천현(衿川縣)에 속했던 지역으로, 금천현은 조선 건국 후인 1414년(태종 14) 과천(果川)을 병합해 금과현(衿果縣)이 되었다가 두 달 뒤 과천을 다시 설치하면서 금천과 양천(陽川)을 병합해 금양현(衿陽縣)이 되었고, 1416년(태종 16) 경기도·충청도·전라...
-
1932년 2월 서면공립보통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와 교사 성만용(成萬鏞)이 편찬한 『서면향토지』를 통해 읽혀지는 설월리는, 서면의 면소재지임에도 상가나 유흥 시설, 금융 기관, 병원 등의 시설들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여타 지역의 면소재지와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면향토지』는 1927년 서면공립보통학교의 초대 교...
-
선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광명시의 역사. 2010년 현재까지 광명 지역에서는 구석기 및 신석기시대의 유적지가 조사, 보고된 적이 없다. 그러나 목감천 등 하천 주변에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광명시의 지형적 특성으로 미루어 향후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광명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한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철산동 고인묘와 가학동 지석묘 등을 통해 확인할 수...
-
경기도 광명시에서 연속 촬영한 필름을 스크린에 비추어 물건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보이는 영상. 2010년 현재 광명 지역에서는 영화 제작 활동이 전무하다. 1980년대 「꼬방동네 사람들」의 중요한 장면이 광명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2000년대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여 국민을 감동시킨 영화 「말아톤」의 훈련 장면 일부가 광명 지역에서 촬영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
일제강점기 광명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의병(尹宜炳)[1900~1960]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최호천(崔浩天)과 함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하여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청년들과 독립 운동을 계획하여 이끌었다. 그리하여 소하리와 가리대리의 주민 200여 명을 지휘하며 1919년 3월 28일...
-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함천군 이억재(李億載)이다. 이원익의 가계는 익녕군 이치-수천군 이정은-청기군 이표-함천군 이억재-이원익으로 이어진다.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1573년(선조 6)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
경기도 광명시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지리적 요소. 광명시는 경기도의 남서부 중앙에 자리하여 북쪽과 북동쪽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와 금천구 시흥동, 남동쪽과 남서쪽은 경기도 안양시, 시흥시와 경계를 이룬다. 광명시는 광주산맥 끝자락인 수리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가학산(駕鶴山)[220.2m], 서독산(書讀山)[180m], 구름산(雲山)[230m], 도덕산(道德山)[183.1m]으로 이어지...
-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광명 지역의 역사.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광명 지역은 시흥군 서면과 남면으로 편제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현 광명시의 전신으로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광명 지역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 항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3·...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충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전주이씨 익녕군파 후손이 받은 교지.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셋째 부인인 군부인(郡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의 묘소가 광명시 소하동[옛 소하리 마산(馬山) 삼석봉(三石峯) 아래]에 들어서면서 이곳은 군부인 조씨 소생 후손의 선산이 되었다. 이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
-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하천 이용과 관련하여 광명 지역에 내린 조치. 조선하천령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어업 및 하천 이용에 관해 내린 규제 명령으로, 하천을 국토 경영의 일환으로 철저히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조선하천령을 통해 하천이 국유로 규정되었으며, 하천변과 둑 등 하천 구역에 대해서도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폐천(廢川) 처분의 규정이 없어 폐천...
-
우리 민족은 가는 곳마다 먼저 학교를 세우고 높은 교육열로 자녀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철산동의 광명광덕초등학교 설립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을 그대로 보여 준 철산리 주민들의 실제 경험담이다. 1959년 주민들이 직접 세운 광명광덕초등학교는 주민들의 자랑이었고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내 중요한 공공 기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별다...
-
일제강점기 광명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호천(崔浩天)[1899~1960]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21세로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재학생으로 이곳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동네에 사는 이정석(李貞石) 등이 독립 만세 시위를 하다가 노온사리(老溫寺里)...
-
일제강점기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 운동. 1910년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광복까지 끊임없는 항일운동이 전 민족적으로 펼쳐졌다. 광명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주로 3·1운동과 야학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광명 지역에서도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7일, 소하리에 거주하는 이...
-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경기도 광명 지역의 역사. 시대 구분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현대는 1945년 이후를 출발선으로 본다. 광명 지역은 1974년 광명출장소가 되었다가 1981년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1945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서, 남쪽의 경우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 정부로 기능하였다. 광명 지역은 행정적으로 일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