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20104 |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4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성혜 |
[1970년대 철산4동 형성기]
충청북도 제천이 고향인 정운하[1959년생] 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0년에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서울로 올라와 철산리, 지금의 광명시청 건너편 철산주유소 자리에 정착했다.
당시 그곳에는 정운하 씨 집을 비롯해 20여 가구가 무허가 땅에 벽돌로 집을 짓고 옹기종기 붙어살았다. 정운하 씨 아버지는 광명사거리에서 동그마니[곡식을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서 만든 넓고 납작한 원통형 짚풀 그릇]를 놓고 홉으로 씨앗을 팔다가 광명동 158번지 부근에 가게를 얻어서 운영했고, 정운하 씨가 인천 금성사에 다니다 퇴직하고 그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한 것이 1995년경부터다.
도덕산 아래쪽 지금의 철산4동 지역은 철산구도로와 광덕로 사이인 왕승골이라 불리는 곳에 처음 동네가 형성되어 지금의 도덕파크아파트 단지와 광명시민회관 건너 도덕산 등산로 쪽으로 넓혀져 갔다. 그때는 지금의 광명시청 앞 사거리에 공동 우물이 있어서 아침마다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렸다.
철산4동 지역은 1970년대 청계천을 개발할 때 이주한 사람들과 산업화 초기라 구로동 공장으로 일을 다니던 여공들[여성 공장 노동자]과 철산리 지역이 주공 아파트를 짓느라 공사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공사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일이 등에 벽돌과 시멘트, 모래를 지고 나르며 공사를 했기 때문에 공사 기간도 길었고, 그들을 상대로 공사판 함바집에서 가마솥을 걸고 장사도 했다.
[안양천 풍경]
아침이 되면 구로공단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현재 광명시청 앞쪽을 지나 안양천까지 걸어가서, 줄을 이어 당기며 건너는 거룻배를 타고 구로공단으로 출근을 했다. 거룻배는 철산동 끝과 구로공단 입구 사이에 있었는데, 뱀수다리가 보였고, 고척동 쪽으로 철교가 있었다. 당시 철산리에는 버스도 없어서 소하리나 안양으로 가려면 오솔길을 따라 걸어 다녀야 했다. 구로동으로 가는 지금의 뱀수다리는 보의 형태여서 물이 마르면 보를 따라 건너 다녔다.
철산동 토박이인 구인회 씨에 따르면, 뱀수다리는 원래 안양천 뚝과 뚝에 걸쳐져 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당시엔 안양천에서 목욕하다 익사하는 일도 많았고, 물고기도 어찌나 많았는지 물이 마르면 여기저기서 고기들이 펄떡펄떡했다. 미꾸라지 같은 건 매미채로 떠도 쉽게 잡혔기 때문에 영등포 지역 사람들이 와서 양은 다라이[대야]로 잡아 가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광명시 하면 수해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는데, 도덕산 기슭에서 내려다보면 안양천이 범람하여 구로동까지 물바다가 되곤 했다.
[철산리 사람들과 도시 개발의 그늘]
정운하 씨는 구로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기 전 유한중학교에 다녔고, 학군 1세대로 성남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교육열이 있는 부모들은 광명시에 있는 학교보다 서울에 있는 학교를 선호했다. 그러나 정운하 씨의 친구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거나 구로동이나 영등포, 신도림의 신발 공장에 다녔다. 진일고무라고 고무신과 운동화를 만드는 진양화학의 자회사이다.
당시의 농사는 괭메이호박으로 불리던 호박, 오류동참외라 불리던 과채류가 주였다. 당시 철산리 사람들은 리어카를 끌고 오솔길을 따라 뱀수다리 너머 구로동을 지나서 영등포 채소시장인 영일시장에다 주로 팔았다. 그때의 친구들은 어디로 떠났는지, 아무도 연락처를 알 수가 없다. 남자들의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울 정도라면 여자들의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을 때였다.
철산리는 토박이 몇몇을 빼면 참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철산리가 얼마나 낙후했는가 하면, 충청남도 시골서 10마지기 논을 팔면 철산리에서 20마지기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충청남도 서산의 대농들이 자식 교육 문제 등으로 도시로 올라온다고 땅을 팔고 와서 광명시청 아래 지금의 철산주공13단지 부근에 주로 모여 살았다. 이후 도시 개발이 이뤄지면서, 평당 몇 십만 원씩 토지 보상을 받으면 서울에서 5층 빌딩을 사고도 돈이 남을 정도였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 돈을 지키지 못해 풍비박산 나고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 이야기도 흔하다.
[1980년대 철산동 도시화 직전의 풍경]
철산리의 교통이나 도로 사정은 형편없었다. 시청고개에 구도로가 하나 있었고, 안양으로 가는 화영운수버스가 하나 있었다. 당시엔 버스 기사 맘이라 버스가 서지도 않고 다녀서 광명시장에서 술 마시던 사람들이 화영운수 기사를 만나면 두들겨 패기도 했다. 철산리와 너부대에서 공사일 하던 인부가 광명시장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돌아가다 복개하기 전, 사거리 개천에 떨어지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당시는 개봉동에서 광명사거리까지만 포장이 되었는데, 1972년 광명공업고등학교 입구에 121번 세풍운수 차고지가 생기고 약 5년 후에 도로가 포장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철산리엔 시장이 광덕초등학교 쪽으로 있었고, 점방[작은 가게]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다. 현재 광명시청이 들어선 자리는 공동 묘지였고, 광명고등학교 자리에는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법당 없는 슬레이트 가건물이었다.
정운하 씨 집 아래쪽으로는 고등공민학교가 있었는데, 슬레이트 1층 건물 교실 네 칸짜리 야간 고등학교였다. 주로 영등포나 아현동 사람들이 다녔으나 몇 달 후 현재 광명공업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철산중심상업지구 자리는 기와집이 몇 채 있는 밭이었다. 어느 날, 철산중심상업지구가 일사천리로 들어섰는데, 처음부터 유흥가가 많이 들어섰다.
[1990년대의 변화, 민관이 협력하는 전통의 시작]
철산4동 지역은 구로공단에 직장을 둔 여성들이 주로 살던 주거지이기도 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으나, 2009년 현재 그 자리들은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산4동의 주공 아파트는 13평[42.98㎡]과 15평[49.59㎡], 18평[59.50㎡] 정도였는데, 구로공단의 기업체들이 매입하여 기숙사로 활용하기도 했다. 11평[36.36㎡]에 평균 다섯 명 정도가 생활했다고 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거나 판잣집에서 살던 여성 노동자들 또는 인쇄업 등에 종사하던 남성 노동자들이 결혼을 하면 현재 광명시청에서 보이는 오른편 동네로 거주지를 옮겨 가정을 꾸려 정착했다고 한다.
번창하던 구로공단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이다. 많은 공장들이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가까운 시흥시의 시화공단으로 이전했는데, 이때 구로공단 지역 여성 노동자들 대신 산업 연수생으로 왔던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 돌아가지 않고 남게 된 사람들이 철산4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거주 문제는 철산4동에 뜻밖의 걱정거리를 제공했다. 우선 시급한 문제가 쓰레기 분리수거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에게 분리수거 방법을 안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철산4동주민센터 직원들은 광명만남의 집의 필리핀 수녀를 찾아가 분리수거 문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 분리수거 문제는 광명만남의 집과 철산4동주민센터가 함께 필리핀 및 동남아 노동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계절 환경이 달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겨울옷을 배부하는 일을 하면서 철산4동은 관과 민이 서로 협조하는 전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철산4동의 열악한 환경은 결국 철산4동이 처한 문제이기 때문에 관과 민이 서로 나누고 미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철산4동주민센터는 법의 테두리에서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지원하고, 시민 단체와 자원 봉사자들은 미처 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두루 살펴 지원을 요청하는 민관 생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모범을 보이고 있는 곳이 바로 철산4동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