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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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철산2동·철산3동·철산4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철원 |
[운명과도 같았던 홍수 피해]
철산리가 속해 있는 광명시청이 개청 이후 가장 먼저 맞은 지역 문제는 홍수였다.
1981년 7월 2일 새벽, 광명시민들이 광명시청 개청으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곤히 잠들어 있던 시각, 수도권 일대에 내린 집중 호우로 213가구가 침수되고 833명이 인근 학교로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철산리를 포함한 광명 지역은 안양천이 동쪽으로 흐르고 시 북쪽 끝에서는 부천 지역에서부터 흘러오는 목감천이 만나기에 여름철이면 집중 호우로 인한 피해가 잦았다.
관악산과 수리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안양천 상류 지역에서부터 불어나 광명 지역까지 내려오면 이미 물은 거대한 황토 더미가 되어 광명, 목동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다.
1932년인 일제강점기 때 홍수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안양천 제방을 쌓기도 했지만 몇 해에 한 번씩 발생하는 집중 호우는 철산리 주민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그래서 철산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들 사이에는 전해 오는 속담이 있다. “철산리에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이 말은 조그만 비에도 진창이 되어 버리는 안양천 주변 철산리 일대의 토질을 두고 한 우스갯소리다.
[집중 호우가 남긴 문제들]
광명 지역 토박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큰 홍수는 10년 간격으로 일어난 1977년 7월 홍수와 1987년 7월 홍수다.
1977년 안양천 주변에 쏟아진 기록적인 집중 호우[강우량 432㎜]와 서해안의 만조가 겹치면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안양천 수위를 대폭 올렸다. 7월 8일 최대 강우량은 21시부터 22시까지 한 시간당 99.0㎜에 달했다. 당시 집중 호우로 안양시와 시흥군 내의 인명 피해는 사망 161명, 실종 24명, 부상 400명, 이재민이 3만 4947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날의 일은 안양천을 사이에 둔 안양과 양천, 구로, 광명, 영등포 지역 주민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재난의 기억이기도 하다.
1987년 7월 26일부터 27일까지의 집중 호우로 인한 피해도 컸다. 7월 21일부터 22일 사이 이미 남부 지방을 강타한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7월 26일 오전부터 광명시 전역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부터 비가 폭우로 변하더니 시 전역에 389㎜의 집중 호우가 내렸다. 27일 새벽 2시부터 3시 사이에는 최고 81㎜의 강우량을 기록할 정도로 퍼붓는 비로 안양천과 목감천이 범람하여 하안동과 철산3동 일대 저지대와 광명동 시가지 주택 7890동이 순식간에 침수되었다.
1만 2053세대 4만 538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3명이 사망했다. 농경지는 물론 각종 농작물이 유실되었고, 도로·하천·제방·축대 등의 공공 시설물이 파괴되어 약 69억 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1987년 당시 수해는 중소 도시 규모에서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이재민이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철산3동의 경우 1732세대 5591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1424채의 가옥이 침수되는 등 피해가 컸다.
특히 계속되는 강우로 피해를 입은 가옥의 물이 빠지지 않아 3주간에 걸쳐 주민들이 대피소에 장기 수용되는 바람에 고통의 정도가 더욱 컸다. 물과 함께 쌓인 오물 수거도 문제였다. 8월 10일까지 14일간에 걸쳐 경기도 타 시군의 지원 등으로 오물 5500여 톤, 분뇨 960㎘를 수거하여 그나마 주민들의 위생을 돌볼 수 있었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재민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그리하여 7월 28일 광명고등학교에 있던 100여 명과 철산여자중학교에 있던 100명의 이재민이 구호품 분배에 불만을 품고 28일 새벽 2시 광명시청으로 몰려와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비록 예년에 없던 기록적인 강우량이긴 했지만 시로 승격했음에도 하수 문제 등 도시의 인프라가 부족해 피해가 컸던 점을 인식한 시민들은, 이후 시와의 간담회 등에서 철산동·하안동 지역의 개발 사업을 조속히 추진하여 인프라를 확충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홍수의 피해는 새로운 개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1987년 수해보다는 작은 규모였지만 1985년에도 수해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때의 수해로 안양천 변에 난립해 있던 무허가 판자촌이 상당수 유실되어 철산리 개발 계획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지우고 싶은 힘든 기억이었지만 이후 시민들과 광명시 당국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홍수 피해 이후 수해 방지를 위한 펌프장 증설 등 여러 조치가 이어진 결과 철산동 쇠머리 지역에서는 2010년 현재까지 수해로 인한 피해는 보지 않고 있다.
또한 광명시에서는 시 차원에서 『수해백서』를 발간하여 집중 호우로 인한 피해 상황뿐만 아니라 향후 복구 방향까지도 면밀한 기록으로 남겨 ‘유비무환’의 교훈을 남겼다. 모두 쇠머리 기억의 교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