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1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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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繁華-都心-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철산2동·철산3동·철산4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성혜 |
1960년대 이후 서울특별시는 급격히 도시화가 되었고, 지방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급증하게 되자 심각한 주택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서울특별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과 인접한 교외 지역을 일방적으로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면서 행정 구역을 확대해 나갔다. 서울 교외 지역을 도시화하여 인구를 서울 외곽으로 분산시켜서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1963년 9월 17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하안리 일대 지역 12.37㎢가 서울특별시도시개발계획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서면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경기도인 광명시의 전화 지역번호가 02인 까닭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서울특별시의 개봉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일명 ‘60만 단지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광명리와 철산리 일부가 개발되었다.
제1지구인 광명사거리 일대 30만 단지가 서울특별시 주도로 개발되면서 상하수도와 전기, 우편, 전화 및 도로 개설 등 주요 기반 시설을 서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도시 개발 이전에도 광명리와 철산리는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전기며 전화는 가까운 영등포구[이후 구로구와 금천구로 분구됨]로부터 비용을 지불하며 이용했다. 서울이란 곳은 새롭고 앞선 문물과 문화가 도입되는 곳이었으니, 이러한 흐름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1981년 시흥군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이 광명시로 승격되고도 서울특별시 주도의 도시 개발은 계속되었다.
이렇듯 광명시는 서울의 도시 개발과 공단 배후 도시 건설 등 위성 도시와 베드타운(bed town)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시 승격 이후인 1982년 12월 28일 광명시 자체의 도시 개발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1984년 ‘2001년 광명도시기본계획’이 승인되면서 비로소 광명시만의 독자적인 도시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도시 기반 시설인 상수도의 경우 노온정수장의 관리권이 광명시로 이관되고, 전기는 한국전력 광명지점, 우편 업무는 서면우체국의 개설로 광명 지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 업무는 2009년 현재도 광명동·학온동·철산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소재한 KT개봉지점에서, 하안동·소하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금천구에 소재한 KT금천지점에서 관할하고 있다.
2002년 12월 21일 광명시를 관할하는 KT개봉지점의 전화 국번 앞자리에 번호 ‘2’가 추가된 것 이외에는 ‘02’인 전화 지역번호 역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에, 경기도인 광명 지역에서 서울 시내 요금으로 서울과 광명 지역이 같은 전화를 쓴다는 의미는 특별한 것이었다. 값비싼 시외 전화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세대들에게는 서울 전화를 사용한다는 것이 서울시민의 지위를 갖는 특권을 누리는 듯한 기분을 주었던 것이다.
[서울로 편입되리라던 기대가 낳은 부작용]
서울시는 1976년 11월에 ‘구로공단 주변 정비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단 주변 지역의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공공 시설물을 확충하며, 행정 구역을 조정하는 방안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시는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대단위 아파트를 건설하여 거주자를 이주시키고 근로자를 위한 복지 시설을 지으려고 했으나, 공단 주변 지역에는 마땅한 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구로공단 제3단지 서측 안양천 건너편의 시흥군 철산리[현 광명시 철산동]를 서울시로 확장한다면 구로공단 정비 계획 사업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철산리에 근로자를 위한 아파트와 복지 시설을 설립하면서 철산리를 서울로 편입시키려는 ‘행정 구역 조정’이 주요 과제로 선정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철산리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명이 서울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이주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광명과 철산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것이라는 소망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기대는 이후 광명시의 정체성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이러한 소망과 달리 수도권 확장 방지 정책이 강화되면서 광명시는 산업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서울의 베드타운, 위성 도시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실례로 개청 15년이 지난 1997년 당시에도 광명시민 대부분이 서울에 직장을 두고 출퇴근을 하고 있었으며, 학부모인 가구주 중 광명시에 직장이 있는 경우는 20~30%에 불과했다. 또한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 지역으로 이사하는 일이 잦아서, 초등학교 학부모의 64.7%가 전출할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광명시는 1982년부터 주체적으로 도시 개발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면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교육과 문화·복지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성 도시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로 인해 광명시는 자족 도시로서의 능력을 키울 수 없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가 이주민이면서 구조적으로는 위성 도시이자 베드타운이라는 한계에서 발생하게 된 지역 정체성의 문제는 2009년 현재까지도 광명시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시 승격과 관련한 뒷이야기]
1977년 8월 15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공화당 지역개발심의위는 최근 의원들의 건의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과 인구 10만이 넘는 시흥군 서면 광명 단지 그리고 1.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전남 나주와 영산포읍을 합쳐 각각 시로 승격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던 것.
오학진(吳學鎭) 의원은 ‘광명 단지는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과 인접, 생활권이 서울에 속해 있어 서울시 편입이 바람직하다만 그럴 경우 시흥군제가 줄어든다고 반대하는 여론도 있어 난처하다’고 고충을 토로. 읍을 시로 승격시키는 데는 대충 20억 원이 들어 내무부는 시 승격에 신중한 태도…….”[이하 하략]
1980년대 초 지역 주민들은 광명의 서울 편입이라는 숙원 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2만여 명이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시로 승격된다고 발표되었을 때는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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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 내용 수정 | <변경 전>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하안리 일부 지역 12.37㎢ <변경 후>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 하안리 일대 지역 12.37㎢ |
2014.11.10 | 원고 내용 일부 수정 | <변경 전> 1962년 9월 12일 / 광명리와 철산리 일부가 개발되었다. / 광명동·학온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소재한 KT개봉지점에서 <변경 후> 1963년 9월 17일 / 광명리와 철산리, 하안리 일부가 개발되었다. / 광명동·학온동·철산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소재한 KT개봉지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