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C01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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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철원 |
[광명시민회관 옆 고인돌]
철산동의 광명시민회관 전시실 입구와 광명시민운동장 사이 자그마한 녹지 사이에는 장방형의 육중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이 바위는 ‘철산동 고인돌’로 알려진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철산동 고인돌은 보통 덮개식이라 말하는 북방 양식으로, 육중한 덮개돌과 상대적으로 작은 받침돌 2개로 이루어져 있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2007년 주변 재정비로 푸른 소나무와 침목이 깔린 진입로가 놓이면서 시민들이 찾는 깨끗한 환경이 되었고, 철산동 고인돌은 그곳에 조경석처럼 덩그렇게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차량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광덕로 바로 옆에서 도심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고인돌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다.
철산동 고인돌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두 번이나 터를 옮긴 사연을 갖고 있다. 보통 고인돌은 약 2000년 이상의 시간 나이를 가지고 있는데, 철산동 고인돌는 지난 2000년 동안 있었던 자리를 최근 20년 사이에 두 번이나 옮겼다. 고인돌에 쌓인 시간의 무게와 공간의 크기가 개발의 논리 앞에 너무나 가볍고 좁아 보이는 대목이다.
현재의 광명시민운동장이 조성되기 전에 이곳은 조전문 씨가 가꾸던 포도밭이었다. 원래 고인돌이 있었던 곳은 바로 조전문 씨 포도밭이었다. 당시 토지 소유자였던 조전문 씨는 462-33번지와 462-24번지에 선현의 묘와 포도밭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이미 지난 1970년대에 문화재관리국이 와서 조사를 했고, 개발이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983년에도 토지 조사를 했기 때문에 조전문 씨는 자기 밭에 있는 바위가 고인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84년 본격적으로 추진된 철산동 택지 개발로 철산동 일대가 철거, 정비되면서 이 고인돌의 처리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오고갔다.
조전문 씨는 철산동 개발 계획이 발표된 후 고인돌의 처리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당시 조전문 씨가 광명시와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측에 수차례에 걸쳐 고인돌 관리에 대한 의견[관리인 지정 신청, 직산조씨 선산 이전지인 안성으로의 자비 이전 건의]을 제시했던 문서들이 그 고민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고인돌을 이전하다]
광명시와 문화재청, 대한주택공사에서는 고인돌의 처리 방안에 대한 논의 끝에 발굴 후 가까운 곳에 이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5년 1월 5일부터 1월 31일까지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당초 위치에서 북동쪽 45도 방향으로 직선거리 150m 평행 이동하여 재설치하였다. 그 곳은 광명고등학교 교문 옆 운동장 한구석이었다. 후속 조치로 광명시에서는 고인돌을 광명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그 터도 고인돌의 안식처는 되지 못했는지 1990년 8월 현재의 자리인 광명시민회관과 광명시민운동장 사이로 이전하였다. 광명고등학교가 학생 수 증가에 따른 관리상의 어려움과 학교운동장 확장 등을 이유로 이전 요구를 함에 따라 시정조정위원회를 거쳐 결국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던 것이다.
발굴 당시 기록을 통해 상황을 보면 고인돌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었는데, 이 방향은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광명성애병원과 철산주공12단지 사이를 흐르던 안양천 지류가 흘러가는 방향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천 지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므로 고인돌에 묻힌 피장자의 머리도 서쪽 방향으로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덮개돌과 받침돌에 사용된 암석은 석영이 많이 섞인 화강암이었는데, 비슷한 재질의 암석이 고인돌 북쪽 구릉인 현재의 광명시청 방면에 많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돌을 채취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강암 채석장 흔적도 있었으면 주변에 고인돌이 더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당시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주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문화 유적의 보존과 현실을 생각게 하다]
철산동 고인돌를 조성한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풍부하고 울창했던 시절, 안양천과 도덕산을 배경으로 철산동의 주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전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철산동 고인돌 옆 대로에는 많은 차량들이 지나고 있고, 고인돌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철산동 고인돌의 이전 과정은 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문화유산이 처리되는 현실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오늘날에는 문화재가 발견되면 지표 조사를 비롯한 여러 보호 조치가 취해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는 첫 번째 고려 대상이 아니다. 점유자의 전언에 의하면 철산동 고인돌의 존재는 1970년대부터 알려졌지만 결국 개발에 밀려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문화재 인식의 현실을 보여 주는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은 우리라고 말하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 줄 것이다. 한때 고인돌을 다듬고 깎으면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을 법한 예전 이 땅의 주인들에 대한 예의를 지켰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