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B03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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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돼지로 시작해서 젖소까지 길러]
강진근[1938년생] 씨는 청장년 시절 목장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 처음 목장을 하게 된 것은 친구가 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젖소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게 1974년도의 일이다. 처음에는 소를 살 돈이 없어서 암퇘지 두 마리를 길렀다. 이 돼지 두 마리가 이틀 걸러 새끼를 아홉 마리씩 낳아서 새끼 열여덟 마리를 낳았다. 순식간에 어미돼지까지 해서 모두 20마리가 되었다. 강진근 씨는 온 정성을 쏟아 돼지를 길렀다.
그 후 돼지를 모두 팔고 그 돈으로 수원 북문까지 걸어가서 송아지 한 마리를 샀다. 그 송아지가 황소가 되자, 황소 한 마리를 팔아서 이번에는 젖소 새끼를 샀다. 열심히 일도 하고 계도 붓고 해서 그 이듬해에 젖소 새끼 한 마리를 또 샀다. 그렇게 두 마리로 시작한 게 점점 늘어나서 64마리까지 늘었다. 초창기에는 젖소 한 마리에 쌀 15가마니로, 한우보다도 더 비쌌다. 한창 시세가 좋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는 임신한 소 한 마리에 460~470만 원까지 나갔다. 그때는 낳은 지 1주일밖에 안 된 송아지도 160~170만 원까지 나갔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외국에서 소를 들여와 팔면서부터 소 값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소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강진근 씨는 축사도 계속 늘여 갔다. 처음 축산업을 시작할 때는 집 귀퉁이에다가 축사를 지어 소를 기르다가 곧이어 집 옆에 45평[148.76㎡]짜리 축사를 지었다. 그러나 소가 계속 늘어나니까 건평 90평[297.52㎡]짜리 축사를 또 지었다.
[젖소 사육에서 임대 사업으로 방향을 틀다]
강진근 씨는 광명 지역 축산계장을 지내는 등 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래서 1992년에는 축산업협동조합원 1700명 중 23명에 뽑혀서 일본 견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 일본 가서 보니 일본은 소 값이 한국의 1/3값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국도 소 값이 떨어질 거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강진근 씨는 친목회를 조직해서 1994년에 친목회 돈으로 한 사람 앞에 150만 원을 들여 8박 9일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로 견학을 갔다.
당시 한국에서는 송아지 한 마리에 100만 원이 넘었는데, 거기 가서 보니 송아지 한 마리가 한국 돈으로 4~5만 원 정도 했다. 한국의 1/20값이었다. 그 즈음 외국에서 살아 있는 소를 들여온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거기 가서 보니 ‘우리나라는 이제 전망이 없겠구나’ 싶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다시 1996년에 형님이 미국 관광을 가자고 해서 샌프란시스코와 애리조나 주, 로키산맥 등지를 돌아봤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로 소 값이 쌌다. 안 되겠다 싶어서 1998년에 소를 다 처분했다.
한참 짤 때는 하루에 우유가 500㎏ 넘게 나왔다. 그때 돈으로 하루에 30만 원이 넘는 돈이 나온 것이다. 그때는 이런 수입은 없겠다 싶었는데, 앞으로는 전망이 없을 것 같아서 전부 처분을 했다. 그나마 강진근 씨는 시세가 제일 좋을 때 팔아서 그 뒤에 판 사람들보다 한 마리당 약 50~60만 원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었다.
강진근 씨는 목장을 그만 둔 후 축사였던 곳을 임대를 줘서 거기서 나오는 세로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 옆에다 100평[330.58㎡]짜리 창고 하나를 더 지어서 그것도 세를 놓았다.
아방리[능말] 곳곳에는 창고나 비닐하우스를 많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토박이 주민들이 근교 농업이나 축산업을 많이 했다면, 근래에는 벼나 참외, 가축을 키우던 땅에 비닐하우스나 창고를 짓고 세를 놓아서 그 임대료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는 서울 근교의 산업이 농업과 축산업에서 공업으로 변화해 간 까닭이기도 하지만,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이 고령화되면서 더 이상 생산에 종사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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