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B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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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꽃다운 나이 시집 와 어느덧 일흔아홉 살]
이재숙[1932년생] 씨는 집안일을 하면서 처녀티가 날 무렵, 아방리에서 신천리로 시집온 이웃집 아주머니 남편 소개로 아방리[능말]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신랑은 금천강씨 강중근 씨로 이재숙 씨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정확히 몇 살 때 시집을 왔는지 되물어 보았지만 이재숙 씨는 기억을 못했다. 그저 10대 후반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당시 아방리[능말]는 산골 마을로, 마을 앞 들판 사이로 난 마찻길을 따라 소래면을 오갔다. 당시 소래면과 사이에 있는 목감천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건너지 못했다. 혼례를 할 때는 친정집에서 초례를 하고 시댁에서 폐백을 했다.
시댁으로 올 때 이재숙 씨는 택시를 타고 왔다. 당시에도 가마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마침 이재숙 씨가 시집 올 무렵 신천리에 택시 영업을 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그 택시를 빌린 것이다. 마을에도 혼례복과 가마가 있어서 임대할 수 있었으나 가마를 빌리는 돈보다 조금 더 주어 택시를 빌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례를 할 무렵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선을 보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짝을 맺어 주는 대로 했다. 남편 강중근 씨는 66세가 되던 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작고하였다. 현재 살아 있으면 여든한 살이 된다.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
이재숙 씨 남편 강중근 씨는 8남매 중 맏이였다. 시동생 다섯에 시누이가 셋이었다. 이들 모두 결혼을 시킬 때까지 이재숙 씨가 돌보아 주었다. 시동생 중 막내는 그의 아들과 동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길렀다. 시댁에 와서 식구가 많아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젖먹이 아이를 집에 놓고 들에 나가면 시누이들이 키웠다. 정신없이 살았다.
이재숙 씨는 원래 일을 잘해 시부모에게 구박 같은 건 받지 않았다. 야단을 맞아 본 적도 없다. 당시에는 식구가 많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바지저고리를 빨아서 말려, 풀칠을 하고 숯불을 담아 인두로 다린 후 가족들 옷을 입혔다. 해진 옷은 꿰매 입혀야 했기 때문에 밤에는 바느질 하느라 바빴다. 당시에는 주택 주변에 물이 없어 능촌천까지 빨래감을 이고 가서 빨래를 하고 돌아왔다. 당시 시집에는 논 열두 마지기와 800평[2644.63㎡] 정도 되는 밭 두 더기가 있었다. 그러나 식구가 많아 양식이 부족해 겨우 먹고 살았다.
이재숙 씨가 시집온 지 10여 년 정도 지났을 무렵 마을의 저수지가 터졌다. 그 후로 농사를 짓지 못해 2년 정도 배를 곯았다. 6·25전쟁 때는 안산으로 피난을 가서 신천리로 돌아서 나왔다. 아방리[능말]에서는 고개 너머 인민군과 국군이 대치하여 폭탄이 터지고 수많은 군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마을에도 수시로 폭탄이 떨어져 인민군들이 나가라고 하여 다들 피난을 갔단다.
이재숙 씨는 시집을 와서 3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시동생이 많으니 3년 동안은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 전에 아이가 생기면 유산시켰다. 당시 이재숙 씨네 집은 마을에서도 식구가 가장 많았다. 열다섯 명이 함께 살았으니 쌀이 한 달에 두 가마니씩 들어갔다. 그래서 남의 농사를 소작하면서 식량을 충당했으며, 점심에는 감자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광명 지역에서는 고구마가 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인데, 요즘에는 고구마 농사가 된다.
농사일만 가지고는 살아가기 힘들어 이재숙 씨는 양은장사도 하고, 달걀장사도 했다. 달걀장사는 집에서 닭을 키워서 팔기도 하고 도매상에서 사서 팔기도 했다. 달걀 열두 판을 머리에 이고 영등포 주변의 가정집을 찾아다니면서 팔았는데, 달걀을 한 판 팔면 당시에 300원이 남았다.
구름산 에서 산나물을 캐서 아방리[능말]에서 영등포로 가는 길에 걸어가면서 팔기도 하였다. 당시 오리동까지 버스가 다녔으며 버스비가 5원 할 때인데 그것이 아까워서 걸어 다녔다.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다. 아침에 밥을 지어 먹고 나가면 낮에는 시누이들이 집안일을 했다. 젊었으니 무말랭이도 말려서 팔고, 밭에서는 냉이를 캐고, 산에서는 취나물[취떡을 빚을 때 하는 나물과는 다름]과 뚜깔나물, 둥글추[취나물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둥글면서 복슬복슬하게 생긴 나물], 며추[취나물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가늘고 반짝거리면서 윤기가 남], 배나물 등을 뜯어서 팔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아방리[능말]에서 몇 명은 이재숙 씨처럼 나물 등을 팔러 다녔다.
이재숙 씨는 요즘도 열심히 일을 한다. 15명의 대가족 맏며느리로 절약하고 부지런하지 않았으면 살아올 수 없었던 젊었을 때의 삶이 지금도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시동생과 시누이를 모두 출가시키고 팔순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이재숙 씨는 노인정을 마다하고 늘 밭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부지런함은 어려운 시절을 보낸 아방리[능말] 할머니들의 삶이기도 하다.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이재숙 씨의 얼굴은 온화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 밝고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온 이재숙 씨의 삶의 모습이 노년의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소박한 일상의 신앙, 안택고사]
이재숙 씨는 우리의 민속 신앙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소박한 이 땅의 할머니다. 이재숙 씨는 시어머니에게서 배운 대로 지금도 정성을 다해 안택고사를 지낸다. 잔꾀를 부리거나 자신의 편의 위주로만 생각하는 요즘 사람들의 세태와는 사뭇 다른 진지함이 있다. 그런 진지함이 있었기에 이재숙 씨는 마을에 자주 흉사가 일어나자 스스로 팔을 걷고 돈을 거두어 일꾼을 사서는 구름산에 산제당을 짓기도 했다.
이재숙 씨는 옛 어른들에게 배워 온 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구름산 산신님을 섬기고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며 소박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듯한 이재숙 씨의 온화한 표정에서 필자는 일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은자를 만난 듯 숙연해졌다. 이런 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 아닐까. 이재숙 씨야말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불보살이나 생명을 점지해 주고 돌보아 주는 삼신할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우리도 팔순을 바라보는 노년이 되었을 때 이런 모습에 닮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 그만 가. 나 일해야 돼.” 하고 이재숙 씨가 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에는 예전처럼 어려운 시절은 아니지만, 밭에서 고추 등의 채소를 따서 상점에 파는 것이 소일꺼리가 되었다고 말하며 이재숙 씨는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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