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B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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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더위가 한풀 꺾이는 2009년 8월 말 오후, 필자는 능촌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용인순대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마을을 돌아보다가 새터말 고추밭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잠시 말을 걸어 보고 지나치려고 하였으나 얘기를 할수록 삶의 자취가 물씬 묻어나는 할머니에게서 발길을 멈추었다.
“더운데 노인정에 가서 쉬시지 어떻게 여기서 일만 하세요?” 하고 필자가 묻자 할머니는 “애들이 하니까 농사를 안 할 수도 없고 고추를 따서 가게에 넘기고 있어요.” 하고 대답을 해 준다.
할머니가 잠시 밭가로 나온 틈을 봐서 필자는 할머니한터 언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았는지, 살아온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했다. 할머니는 “내가 뭘 아는 것이 있어야지.” 하시면서도 조곤조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하나씩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생들 돌보다 학교도 그만뒀어]
이재숙[1932년생] 씨의 친정은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다. 아방리[능말]에서 목감천을 건너 산을 넘어가면 친정 마을이 나온다.
이재숙 씨의 친정은 농사를 짓는 집으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머슴을 둘 만큼 큰 부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당에 노적가리를 쌓아 놓을 만큼 땅이 제법 있었다. 이재숙 씨는 남동생 둘에 여동생 다섯을 둔 8남매의 맏이였다. 그래서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동생들을 키우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이었다. 동생들은 모두 업어서 키웠는데, 애기를 업다가 종종 떨어뜨리기도 해서 야단도 많이 맞았다.
학교는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그때가 해방이 되던 해였다. 농사철에 부모님이 일을 나가면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해서, 그렇게 며칠씩 학교를 나가지 않다 보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게 되어 결국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교를 다닐 때는 일제강점기여서 일본말을 학교에서 배웠으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지금은 잊어버렸다.
당시에는 학교에서 매일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부르고, 신천리고개에 일본 신사가 있어 학교를 오갈 때마다 ‘가미사마[일본 신]’에게 절을 했다. 그곳 신사는 소래면에 하나밖에 없는 신사였는데, 그때는 학교에서 시켰으니 신사에 인사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만 알았다.
당시에는 고사떡을 쩌 놓고 가정에서 고사도 많이 지냈고, 무당들이 굿도 많이 했다. 가정에서도 병이 나면 점을 친 후에 굿을 많이 했다. 마을에 제당(祭堂)은 없었다. 지금도 소래초등학교가 있는데, 이재숙 씨가 다녔던 모교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당시 아방리[능말]에는 간이학교[온신초등학교의 전신]가 있었다.
이재숙 씨는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들도 공부를 잘 해 큰아들은 서울대학교에서, 작은아들은 국방부에서 근무를 한단다. 막내아들은 현재 쉰한 살로 그와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