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A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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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다음에 소개하는 두 분은 외지에서 설월리로 시집와서 50년 혹은 그 이상을 사신 분들이다. 설월리의 여느 주민들처럼 이분들은 농사일을 하며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이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생동감 있는 설월리의 지난 세월을 들여다보자.
[설월리에서 살아온 70년 세월]
설순금[1921년생] 씨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가마를 타고 이곳 설월리로 시집을 왔다. 와서 보니 시부모와 남편이 살고 있던 집은 가마도 못 들어갈 정도로 오막살이집이었다. “안방 1칸, 건넌방 1칸, 마루 1칸짜리 집인데 부엌은 제법 컸어.”라고 설순금 씨는 옛날을 회상하였다.
설순금 씨는 열아홉 살부터 아이들을 낳기 시작해서 내리 5남매를 두었다. 남편[전주최씨]이 광산에서 일하다가 부상을 입었는데, 당시 서면에는 병원이 없어서 시흥까지 가야 했다. 시집살이는 심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항상 설순금 씨를 ‘애기야’로 부르며 인자하게 대해 주었다. 시부모 두 분은 공동묘지에 모셨다. 당시는 누구나 그랬듯 상여로 모셨다고 한다.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남편이 서른세 살 젊디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설순금 씨가 서른 살 때의 일이었다. 남편과 찍은 사진 한 장 없을 만큼 고단하게 살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설순금 씨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정 식구들 덕분이었다.
“5남매를 두고 세상을 떠나니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지. 그래도 이웃 마을 학온동의 친정식구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 친정 동생은 옆집이 쓰러졌을 때 위험하다고 기둥으로 무너지던 집을 받쳐 주기도 했고, 친정아버지가 이엉 엮어서 지붕도 이어 줬어. 땔감은 동생이 해다 주었고.”
설순금 씨는 아이들이 어릴 당시 하루하루 식량을 구하는 게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일 다니며 사다 먹였어. 1되, 2되 사다가 죽이라도 끓여 먹였지. 방 뜨듯하게 해 놓고 화롯불을 항아리로 담아 놓고…… 다 병아리 같았어. 닭이 어미 없으면 풍비박산되듯이 쭉지 밑에 품고 키웠지.”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일해서 설순금 씨는 680평[2247.93㎡] 되는 논을 마련했다. 당시 설월리에는 150호가 넘게 살았다. 그 후 논에서 1년에 쌀 10가마를 생산하면서 애들 배는 곯리지 않게 되어 정말 좋았다고 한다. 물론 쌀 10가마로 여섯 식구가 1년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긴 했지만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고.
“나무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쫓아 와서 잔가지들을 질질 끌고 따라 왔어. 약수터 개울에서 배추 씻고 보리 씻고 다했지. 물지게도 지고 다녔어.”
[도고내고개에 묻어 놓은 사연이 참 많아]
예전에는 설순금 씨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도고내고개를 넘어 학온동[옛 가학동]을 오갔다고 한다.
“고개 옆으로 광산이 있었어. 역사 있는 광산이야. 도고내고개를 넘어 염전에 가려면 돌고개까지 가야 해. 야미로 소금 사러 다녔어. 엿 2말, 3말 만들어서 소금 바꾸러 다녔는데 넘어 오려면 무척 힘이 들었어. 도고내고개를 지나서 안산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염전께 돌고개가 있었어.”
6·25전쟁이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도고내고개를 넘어 피난을 갔고, 외지 사람들은 그 도고내고개를 넘어서 설월리로 피난을 오기도 했단다.
설순금 씨 집은 다행히 폭격을 피했는데, 피난민들로 외양간까지 차고 넘쳤다고.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멍석으로 사방을 둘러치고, 또 바닥에 멍석을 깔고 한동안 지냈다고 한다.
“주변의 집들은 많이 탔어. 피난을 가지 못했어. 애 다섯 데리고 피난갈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장만해 놓은 곡식들을 여러 그릇에 남겨 놓았는데 그거 아까워서 잃어버릴까 봐 피난 떠날 수가 없었던 거지. 친정아버지가 도고내고개 넘어 낮에도 밤에도 오셔서 ‘우리 집에 소마차 있으니 같이 피난가자’고 권하셨어. 어머니에게 복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고 말씀드렸지. 친정아버지가 도고내고개서 여기 설월리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울고 넘어 가셨대.”
[젊어선 힘들었지만 지금은 살 만해]
설순금 씨는 젊어서부터 월성사에 다니며 자식들 잘 되라고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지금의 주지 스님 전에 할머니가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역사가 오래 된 절이야. 시댁은 전주최씨 종가로서 제사가 아홉 반상인데 시집와 보니 집 안에 사당을 모시고 있었어. 집안 내 높은 분들이 의관 갖추고 갓 쓰고 와서 절하곤 했어. 약주상을 봐 놓으면 그분들이 지내고 가셨어.”
5남매가 잘 자라서 증손자도 많이 두었다고 설순금 씨는 한참 동안 자랑을 하기도 했다.
“애들은 다 서면학교 나왔어.
공부를 많이 가르치지는 못했으나 큰아들은 광명시의원을 12년이나 했어. 큰아들은 기아차[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에서 퇴직했는데, 형제들과 화목했어. 작은아들은 뼈가 으스러지게 일을 했어. 나무를 산더미처럼 해 와서 겨울을 나곤 했어. 큰아들이 월남에 가는 걸 막으려고 애 많이 썼지. 이 동네에서도 몇 사람 있었어.”
설순금 씨는 젊어서 집안 할머니 담배밭 부쳐 주다가 담배를 배워서 수십 년째 담배를 즐기고 있단다.
“[젊어서는] 여기저기서 불러서 일을 했어. 쌀도 주고 돈도 주고 해서 열심히 벌었어. 기아차가 들어오고 바다 같던 설월리 논들이 없어졌어. 요즘에는 집에만 있어.”
설순금 씨는 8남매에 맏딸이라 지금은 안 가는 데 없이 행사만 있으면 모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남동생 4형제, 여동생 합해서 8남매야. 그렇게 동기간이 많아. 아들딸만 그저 아무 변고 없으면 그게 제일이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어. 노력만 하면 살지. 다섯 남매를 품에 안고 살아 온 생각을 해 보면 끔찍해.”
[영등포에서 택시 타고 시집온 김옥섬 씨]
김옥섬[1936년생] 씨는 스무 살 때 친정인 영등포 양평동에서 족두리 쓰고 구식으로 식을 올린 후 택시 타고 설월리로 시집을 왔다.
“친정어머니가 설월리 살던 친척집 잔치에 오셨다가 참샘물약수터에 반해서 물 좋고, 산 좋고, 공기 좋다고 설월리로 딸을 시집보내신 거예요.”
설월리로 시집온 후 김옥섬 씨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자녀는 딸 둘에 아들 셋, 5남매를 두었다. 시댁이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었기에 다른 농촌 아낙네처럼 논밭에서 하루 해를 넘겼다.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서 팔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파를 심어서 밭째 넘기기도 했다.
포도 농사도 30년 가까이 지었다.
“포도밭 세 얻어 가지고 포도농사를 30년 지었어요. 설월리 포도는 달고 유명했지요. 그걸로 애들 가르치고 그렇게 살았어요. 포도를 이어다 시흥에 내다 팔고 그러다가, 가게에다 넘겨주고 오고. 나중에는 찾아오는 장사꾼들에게 팔았어요. 과일이 맛있으니까. 포도 좋다고. 그러니까 밭에서 넘겼어요. 그거 한 송이씩 신문지로 다 싸서 몇 소쿠리씩 담아서 팔았어요. 그냥 주지 않고 안 깨지게 잘 싸서 주었어요. 가지고 가서 팔아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넘겼지요.”
김옥섬 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터는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단다.
“지주가 팔 때 알았으면 혹시 샀을지도 모르는데. 형편이 되지도 않았지만, 몰랐어요. 집터 주인이 와서 도장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줬더니 집터를 파느라고 그랬나 봐요. 새로운 집터 주인이 다 나가라고 했지만 설월리에다 대토를 마련해 주기 전에는 비워 줄 수 없다고 거절했지요. 집터 주인에게 이 집터만 재서 팔라고 했는데 안 판다는 거예요. 그래 그냥 지금까지[2010년 4월 현재] 살고 있어요. 재개발이 돼서 정부에서 보상해 주면 나가는 거고. 건물 값이나 받고 나가는 거지요.”
[젊은 날의 설월리 추억]
김옥섬 씨는 비슷한 시기에 설월리로 시집온 이웃 새댁들과의 추억이 많다.
“정월이면 몰려다니며 윷놀고 선배 아줌마들하고 같이 놀고. 여기 설월리는 정월 한 달을 넘게 놀았어요. 이 집 저 집 다니면 놀고 재미있게 살았어요. 젊어서 놀 때. 맨날 일에 찌들려서 그런 거 생각도 안 하고 살았어요. 가끔 놀러가는 거. 관광도 가고. 때로는, 젊은 사람들이 [돈을] 걷어 가지고 밥하고 음식 차려서 리어카 끌고 안양 유원지에 가서 먹고 놀다 왔어요. 포도 농사 처음에는 차가 없어서 몇 년간은 이고 다녔어요. 길이 나면서 차도 다니고 사람들이 들어와서 사 가고 그랬지요.”
한 집안의 주부다 보니 시집온 뒤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물과 관련된 일이라고 김옥섬 씨는 웃으면서 말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냥 새벽같이 우물을 차지하려 했어요. 퍼서 김장거리 거기서 다 씻고, 그랬어요. 그리고 집 앞 개울 깨끗했어요. 구름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샘물인데, 샘이 펑펑 솟으면 개울로 얼지도 않고 내려와서 따뜻하고 정말 깨끗했지요.
개울에서 김장 같은 거 다 씻었어요. 참샘물 퍼서 씻는 것보다 좀 차가워도 개울에서 씻었습니다. 그 밑에서 빨래도 했어요. 개울에 앉아서들 사람들이 다 와서 빨래하고 보리쌀 거기서 씻어 먹고 물 져다 먹고 그랬지요.
[노년의 행복]
김옥섬 씨는 소하동에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서면서 그나마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기아 공장 땅은 설월리 사람들 땅이에요. 논, 밭 있는 사람들 다 팔았어요. 기아자동차가 소하리에 들어온 덕에 아들 형제가 취업해 다닙니다. 막내아들하고, 둘째 아들하고. 기아산업에 들어가서. 그전 농사지을 때보다는 나아요.”
현재 김옥섬 씨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시집와서 시부모한테 빚밖에 물려받지 않아서, 그 빚을 갚기 위해 남편과 남의 땅을 빌려서 포도 농사도 짓고 소도 기르는 등 힘들게 살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남편과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고 있단다.
“밭이 하나 있었는데, 겨우 붙잡아서 안 팔고 살다가 팔아서 작은말[오리동]에 논 서너 마지기를 샀어요.
그것도 복이라고, 정부에서 수용한다고 해서, 그 땅 팔아서 아이들 주고 두 내외가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고 있어요. 건강하고 자녀들이 앞으로 건강하고 자식들 잘되면 그게 복이지요.”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