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A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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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광명 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이 처음 일어난 시기는 3월 27일이다. 당시 서면 소하리에 거주하고 있던 이정석(李貞石)이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선동하다가 28일 아침 출동한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자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서면 지역 주민들이 이정석을 구출할 계획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서 3월 28일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위운동이 일어난다.
[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되다]
3월 27일 밤 당시 소하리에 살던 이정석은 노온사리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3월 28일 노온사리 경찰관주재소 순사보 최우창(崔禹昌)과 가나사와[金澤]에게 끌려갔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李宗遠)은 큰아들이 주재소에 끌려가자 같은 동네에 사는 최호천(崔浩天)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최호천은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이종원이 이정석을 구출해 주기를 부탁하자 최호천은, “그러면 오늘 밤 사람들을 모아 주재소로 몰려가 찾아 줄 터이니 안심하세요. 아저씨도 동행합시다.” 하고 약속하였다.
[시위대를 조직하다]
당시 최호천과 함께 배재고등학교에 다니다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윤의병(尹宜炳)은 3월 28일 이순만(李順萬)에게서 “이정석이 노온사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노온사리 주재소에 구금되어 그를 구출할 작정이니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그리하여 윤의병이 약속 장소에 나가 보자 벌써 20명 가량이 모여 있었다.
윤의병이 이순만과 함께 이들을 이끌고 소하리 내대촌(內大村)으로 가자, 최호천이 약 5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면사무소 부근 주막거리에 와 있었다. 이때 이종원이 “내 아들 이종석을 찾아 돌려주시오.” 하고 호소하였다. 최호천은 윤의병에게 “이 인원만으로는 부족하니 내가리대리(內加里垈里) 사람들도 모아서 습격하자.”고 말을 꺼냈고, 이에 각각 이끌고 있던 시위대를 합하여 가리대리로 향하였다.
한편, 최호천은 3월 28일 밤 동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노온사리 주재소로 가서 이정석을 구하자고 제의하여 이미 1백여 명의 동의를 얻어 놓은 터였다. 이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윤의병이 다시 부근 동리인 내가리대리의 동민 1백 명을 더 모집하여 모두 2백여 명이 되었다.
최호천과 윤의병 두 사람은 시위대를 향해 “어젯밤 이정석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하여 주재소 순사보에게 끌려갔으니, 오늘 밤 그를 찾아 올 작정입니다.” 하고는 그 취지를 알렸다. 이후 최호천이 2백여 명을 통솔하고 윤의병이 솔선하여 군중을 지휘하였으며, 이종원과 동네 사람 김인환·최정성(崔正成)·유지호(柳志浩)·최주환(崔周煥) 등 다섯 명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시위 군중에게 “곤봉이나 돌을 가지고 갑시다.”고 말하였다. 또 주재소 앞에서 시위대들에게 “만일 이정석을 내어 달라고 강박하여 주재소 직원이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결코 퇴각하지 마시오. 휴대한 돌이나 곤봉으로 대항해야 합니다.”고 제의하며 군중을 선동하였다.
[일본 순사와 담판하다]
최호천과 윤의병의 인솔 하에 사람들은 곤봉과 돌을 준비하여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시위대는 먼저 주재소를 포위하고, “이정석을 내 놓아라.”고 함성을 질렀다. 이들은 또 몽둥이로 주재소 앞 게시판을 때려 부수고, 주재소 숙직실 벽에 1치평방[약 9.1㎠]쯤 구멍을 뚫고 침실 문짝에 작은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아카마쓰[赤公]와 순사보 가나사와[金澤], 한국인 순사보 최(崔) 등은 시위대가 접근하자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듯이 가장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두 대열로 나뉘어, 한 대열은 윤의병이 이들을 인솔하여 노온사리 순사보 김정환(金定煥)의 집으로 가서 순사보의 소재를 물으려고 했으나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다른 대열은 최호천이 이들을 지휘하여 같은 동리 순사보 최우창의 집으로 가서 그를 찾았다. 최 순사보는 주막의 온돌방에 기숙하고 있었으므로 시위대는 우선 동리 주막집으로 찾아가 먼저 주인 박제인(朴濟仁))을 찾아, “주인은 어서 나오너라. 최 순사보 놈을 잡아가겠다.” 하고 함성을 울리며 위협하였다. 또 시위대 가운데 몇 명이 불을 켜고 방안까지 뒤져 보았으나 최 순사보를 찾지는 못하였다. 이때 벌써 11시가 넘었다.
시위대가 다시 주재소로 달려가 함성을 울리자, 일본 순사인 아카마쓰는 그제야 방안에서 불을 켜고 앉은 채 “무슨 일로 왔느냐?” 하고 물었다. 이때 최호천과 윤의병 두 사람은 “우리들은 소하리의 이정석이 체포되었으므로 이정석을 구출하러 왔다. 이정석을 내어 달라.” 하였다. 그러자 “지금 이정석은 여기 없다. 본서로 넘어갔다.”고 아카마쓰가 대답하였다. 그래도 시위대가 계속 분노하며 이정석을 내어 놓으라 하자 아카마쓰는, “내일 29일에 본서에 들어가니 그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출원하겠다.” 하며 시위대를 무마하려 하였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이 말로 약속한 사실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말로 해서는 효과가 없으니 계약서를 쓰라.” 하였다. 그러자 아카마쓰는 “관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는가. 그런 짓은 하지 않아도 틀림없으니 속히 해산하라.” 하며 시위대를 무마하였다. 그러자 최호천과 윤의병은 “오늘 저녁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일 밤 다시 습격하기 위해 몰려와서 불태우고 쳐 죽이는 행동을 해도 괜찮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때 노인 한 사람이 “계약한 것이나 다름없소.” 하므로, 최호천이 이끄는 시위대는 주재소 구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다시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를 부르고는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정석과 최호천, 윤의병 등 많은 사람들을 주모자로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가하였다.
[서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소하리 사람들]
서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 중에는 최호천·윤의병·최정성·최주환·김인한(金仁漢)·유지호 등 소하리 출신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현상은 설월리가 옛 서면의 정체성을 간직하여 광명시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게 하는 주요한 잣대가 된다. 면소재지와 근대 교육의 출발지, 나아가 항일 독립 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지역적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특히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른 최호천·윤의병·유지호·최주환에게 정부는 그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또 1995년 11월 18일에는 온신초등학교 교내에 서면 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 운동을 기념하여 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