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A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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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面所在地-面貌-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학 |
1920년대와 1930년대 설월리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1932년 2월 서면공립보통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와 교사 성만용(成萬鏞)이 편찬한 『서면향토지』다. 『서면향토지』에 따르면 과거 서면의 면소재지였던 설월리는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순전한 농촌 지역’이었다. 수림이 울창해 도내 모범림으로 선정된 적도 있고, 서울서 송이를 채취하러 많은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서면향토지』에는 설월리가 서면의 면소재지임에도 상가나 유흥 시설, 금융 기관, 병원 등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고 기술해 놓았는데, 이는 서면 전체가 경제상 풍족하지 못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상통한다. 가리대만 하더라도 천수답이라 조금만 가물어도 벼가 말라 죽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그나마 설월리는 구름산 골짜기와 도고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풍부한 수량의 한내와 너른 벌판 앞을 흐르는 안양천이 있어 상대적으로 풍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풍요로움은 150여 호의 큰말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더디게 변화해 온 설월리]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 한국 사회는 생업, 주거 환경, 의료, 교육 수준 등 삶의 질적인 면에서 매우 고단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광명 지역은 서울 외곽에 존재하는 농촌 지역으로서 한국 사회 전반의 상황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새마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때에도 설월리의 변화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최호진 씨[1944년생]에 따르면, 1960년대 말에야 오리동 일대의 도로가 포장되었고, 그 틈에 설월리도 언덕지대[현 설월길]까지 겨우 도로 포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흔한 목욕탕이나 미장원도 없이 바다 같은 논만이 무심하게 펼쳐졌던 곳이 설월리, 즉 당시 서면의 면소재지 풍경이었다.
1970년대가 되었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 환경은 이전과 비슷했다. 1971년이 되어서 현 소하1동에 400석 규모의 서천극장이 문을 열었으며[1990년대 이후 문을 닫고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편입됨], 광명시 승격 이후인 1984년에야 소하동에서 광명시를 순환 운행하는 버스 노선이 확정될 정도로 문화적 인프라는 물론이고 도로 사정과 교통 상황이 1914년 이후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교육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1968년 10월 12일 설립 인가를 받아 1969년 4월 10일 공립중학교인 안서중학교가 개교할 때까지 설월리 청소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부분 외지[영등포, 안양 방면]로 진학해야 했다.
1970년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설월리는 토지 보상과 함께 취업이 늘어나는 등 경제적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도리어 설월리는 그 변화의 기운을 주저앉히는 사회적 조치, 즉 개발 제한 정책[그린벨트]에 묶여 버린다.
개발 제한에 걸려 있는 전국에서 유례 없는 면소재지가 된 것이다. 이후 설월리 사람들은 ‘한 맺힌 그린벨트’에 묶인 채 나날이 삶의 조건이 낙후되는 상대적 박탈감을 뼈저리게 느끼며 30여 년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2001년과 2007년에 그린벨트는 대부분 해제되었으나, 2010년 현재까지도 설월리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숙원인 제한 없는 개발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광명시의 뿌리를 내리다]
비록 설월리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기는 하지만, 1981년 탄생한 새로운 행정 도시 광명시의 뿌리는 마땅히 옛 서면의 중심지였던 설월리로부터 계승된다고 할 수 있다.
설월리를 중심 마을로 하는 소하동은 행정의 중심지였고, 근대 교육의 산실이었으며, 독립 운동의 기상이 강성한 곳이고 여전히 이원익의 충절이 빛나는 고장이다. 따라서 설월리야말로 신생 광명시의 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마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