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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안산 사람들이 서울 가던 길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A020101
지역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서면향토지』를 통해 본 1930년대 설월리 풍경]

1932년 2월 서면공립보통학교 교장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와 교사 성만용(成萬鏞)이 편찬한 『서면향토지』를 통해 읽혀지는 설월리는, 서면의 면소재지임에도 상가나 유흥 시설, 금융 기관, 병원 등의 시설들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여타 지역의 면소재지와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면향토지』는 1927년 서면공립보통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한 일본인 기타야마 와카니치[北山若二]가 향토 교육의 실재화를 위해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서면의 행정, 산업, 사회, 문화, 교육, 명소, 인물 등 각 분야의 현황과 향토 자료를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기술하고 편집한 것이다. 이후 1930년 11월까지 작업을 끝내고 편찬한 뒤, 1932년 2월에 수정 증보하여 합본한 것 등 4철이 광명시청 등에 보관되어 있다.

『서면향토지』에 기술된 1930년대의 서면을 살펴보면, 당시 설월리에 있던 서면사무소는 1914년 3월 13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설치된 후 원래의 남면 및 내면 박달리를 합해서 관할하였다.

또한 1911년 11월 1일부터 노온사리에 아방리 경찰주재소라고 하여 있던 치안 관리소를 1919년 3월 소하리로 이전하여 소하리 경찰관주재소로 개청하였다. 그러나 1924년 12월 29일 관제 개정으로 폐지되어 1932년 현재 서면의 대부분은 시흥 주재소의 관할에 속하고, 그 중 일부[박달리]는 안양주재소 소관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서면시흥군 전체에서 보면 중앙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서독산도덕산이 서로 연봉을 이루며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서면[현 광명시]을 감싸고 있다. 구름산서독산도덕산의 중간에 있으며 비교적 높은 산이다.

한편, 서면과 동면을 경계로 하여 북류하면서 한강으로 흐르고 있는 안양천 유역에는 매우 큰 평야가 있으며 논과 밭이 있었다. 또한 안양천 유역에는 못과 늪이 많아서 여름에는 서울 방면에서 낚시하러 오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매년 여름 장마철에는 하수가 범람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안양천 지류는 소래면의 경계를 북쪽으로 돌아 서면의 북단에서 본류와 합류하며 이 유역에도 논과 밭이 많이 경작되고 있었다.

상점은 면에 두서너 곳이 있었으나 부업으로 문을 열고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서면은 순전한 농촌 지역으로서, 부업으로 양잠을 하거나 겨울 농한기에 돗자리를 짜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극히 일부분이었다. 가을에는 서울에서 송이를 따러 오는 사람이 많고, 도고내고개 부근에는 이이다[飯田]가 소유하고 있는 광산[황동광]이 있었으나 1919년 이후 문을 닫았다.

1930년대 당시 주로 외지인들이 경작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어서 주민의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 경제는 중류 이하의 척박한 상태여서, 가을에 수확을 해도 그날부터 궁핍한 생활을 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설월리의 경제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김정관[1932년생] 씨와 최문락[1939년생] 씨에 따르면, 1960년대 설월리에는 부농이 많이 살아서 우마차를 소유한 집이 30호가 넘었고, 많은 일꾼들이 상주했던 넉넉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서울로 가는 교통의 길목]

『서면향토지』에 기술된 1930년대 서면의 교통 상황을 보면, 서면은 지세가 북동면의 세 방향이 안양천에 의해 다른 면과 접하고 있어서, 하천이 범람하는 우기에는 가끔씩 교통이 두절되어 불편을 겪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시흥역이 있어 평시에는 교통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동면 시흥리의 박산[박미]에는 경기가도에서 일직리를 지나 수암면으로 가는 3등도로가 있었으나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0년 가을 일본군의 군사 훈련을 위해 교량이 가설된 이후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서이면[현 안양시] 안양리에서 수암면[현 안산시]으로 가는 등외 도로는 박달리에서 수암면으로 가는 도로와 합쳐졌다.

안양리와 수암면 사이의 도로는 1930년 가을 근본적으로 개수되어 1932년에는 안양에서 수암면으로 가는 승합자동차[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가학리에서 소하리를 지나 동면 독산리에서 지금의 국도 1호선과 합치는 도로는 서면의 간선 도로로서 많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새로 개설된 가리대에서 동면 시흥리로 통하는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는데, 이처럼 서면을 지나가는 도로들은 소하리, 곧 설월리를 지나는 길이며, 안양·안산·시흥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길목에 바로 설월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가는 교통의 길목’으로서 서면의 행정 중심지였던 설월리 일대의 도로 사정과 교통 상황은 일제강점기부터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최문락[1939년생] 씨는 1950년대 서울로 학교를 다녔는데, 설월리 앞을 운행하는 서울행 노선버스가 없어서 영등포에서 군용 트럭을 얻어 타거나 시흥역까지 걸어가서 기차[통근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통학을 했다고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초까지도 설월리 앞을 경유해서 현재의 광명시 일대를 통과하는 노선버스는 없었다.

1984년 12월 15일자 『경인일보』 기사에 의하면, 광명시 승격 후 3년이 지난 1984년에야 서울을 거치지 않고 소하동에서 광명시를 직접 순환 운행하는 버스 노선이 확정되었다.

[정보제공]

  • •  김정관(남, 1932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 •  최문락(남, 1939년생, 소하2동 설월리 주민, 동정자문위원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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