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3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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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城王氏 |
영어공식명칭 | Gaeseong Wangsi|Gaeseong W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덕묵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786년 - 왕완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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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기도 광명시 광명7동 |
세거|집성지 | 경기도 광명시 광명7동 |
성씨 시조 | 왕건 |
입향 시조 | 왕완손 |
[정의]
왕건을 시조로 하고, 왕완손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중국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평양 일토산 아래 정착한 후 조명의 후손 수국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받았다. 이 세계(世系)가 수국의 57세손인 왕명의 13세손 왕몽(王蒙)으로 이어졌다. 왕몽은 신라 건국 초기 시중을 지냈으나 정치적 화를 피하여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10여 년간 수도를 하며 ‘전(田)’, ‘신(申)’ 등을 거쳐 ‘차’로 성을 바꾸고 이름을 차무일(車無一)로 하였는데, 그 셋째 아들 왕석시의 후손이 고려의 태조(太祖)가 된 왕건(王建)[877~?]이다. 왕건은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세울 때 도와 시중이 되었으나 궁예의 폭정에 반발한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유금필(庾黔弼), 홍유(洪儒) 등이 거사를 권하여 고려를 개국하였다.
[연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한 후 왕씨들은 옥(玉), 금(琴), 마(馬), 전(全), 김(金) 등의 성으로 위장하여 혈통을 보전하였다. 조선 정조(正祖) 때에 문헌 등을 조사하여 왕씨 성을 되찾고 세보를 만들어 송도[개성]를 본관으로 하고 왕원(王垣)을 1대 조상으로 하였다. 개성 왕씨(開城王氏) 계파는 90% 이상이 왕원의 동양군파(東陽君派)이며 나머지는 평양공파(平壤公派), 양양공파(襄陽公派), 안경공파(安慶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로 구성되어 있다.
[입향 경위]
『개성왕씨세보(開城王氏世譜)』에 따르면 왕원의 25세손인 왕완손(王完孫)[1786~?]이 광명7동 원광명마을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정확한 입향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후손이 지금도 원광명마을에서 살고 있다.
[현황]
원광명마을의 토박이 성씨 중 하나가 개성왕씨이다. 이 마을에 개성왕씨가 많이 거주하였던 것은 아니나 과거 시흥 서면 최고의 부자로 불렸던 왕제민(王濟民)[1929~2017]이 주목된다. 왕제민은 광명 입향조 왕완손의 5세손으로 원광명마을에서 오랫동안 구장 일을 보았다. 왕제민의 집 대문은 광복 후 일본인이 두고 간 목재로 지은 것이었다고 전한다. 광명시가 1982년 10월 15일 보호수로 지정한 원광명 회화나무[광명-2호]는 원래 원광명마을 왕제민 집의 담장에 걸쳐 서 있었다. 지은 지 100년이 넘었던 왕제민의 집은 2000년 말쯤 헐리고 그 주변 일대가 공원이 되어 원광명 회화나무 주변에는 정자와 운동 기구가 배치되어 있다. 왕제민의 아내 박삼분은 회화나무를 ‘회나무대감님’이라 부르며 농사 때나 추수 때,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궂은일이 생길 때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다. 어느 해 벼락이 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장항아리를 덮쳐 깨졌는데 그 일 이후 시어머니가 병이 났다. 이에 돼지머리, 삼색 시루떡 등으로 상을 차리고 밤마다 부뚜막에서 빌자 시어머니가 병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담을 없애고 회화나무 뿌리를 자르고 담장을 세우자 할아버지께서 쓰러졌다. 무당을 불러 도투마리 경을 읽고 굿을 하고 나서야 할아버지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 후에도 나무가 부러져 용마루에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집을 고치고 살았다. 2021년 현재 박삼분은 광명7동에 살고 있고 자식들은 광명의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왕완손과 그 아들인 왕통인(王通仁), 손자 왕장용(王長用)의 묘가 광명 구름산 자락에 있다. 왕완손의 3세손인 왕창기(王昌基)와 왕창희(王昌熙), 4세손 왕광현(王光鉉)의 묘는 원래 광명동의 삼태곡에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한국전력공사 영서변전소가 들어서면서 파묘(破墓)하고 화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