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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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忠公遺訓 |
영어의미역 | Precept of Yi Woni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영자 |
성격 | 유훈|족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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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원작자] | 이원익 |
창작연도/발표연도 | 1606년[선조 39] 7월 |
[정의]
조선 후기 이원익이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遺訓).
[개설]
「문충공 유훈(文忠公遺訓)」은 조선 선조 때 경기도 광명 출신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손에게 전할 말을 글로 남긴 훈계인데, 그의 청백리로서의 검약한 일면을 알 수 있다. 이원익은 1606년(선조 39) 60세 나이에 이르자 자신의 삶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선대의 비문을 인쇄하여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구성]
「문충공 유훈」은 전주이씨 익령군파(益寧君派)의 가계를 정리한 족보(族譜), 『소강공내외자손보(昭剛公內外子孫譜)』의 부록이다.
[내용]
"고조부이자 가문의 시조인 익령군의 부인인 평양조씨 이하 4대가 금천 소하리 오리동[현재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에서 장사를 지냈다. 살아서는 같은 집에서 살고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天理]와 사람의 정리[人情]가 지극하니 선영을 떠나면 수호하기도 어렵고 1, 2대를 지나면 묘소의 위치도 잃어버리니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고 차례로 묘소를 쓰라"는 내용의 글을 아들에게 써 주고 조카들과 손자들에게 보이며 기록으로 남겼다.
[의의와 평가]
「문충공 유훈」은 한 가문의 역사와 얼이 담긴 족보의 부록으로, 시조(始祖)로부터 면면히 내려온 가계를 소중히 여긴, 조선 중기 한 정치가의 자신의 혈족과 그 뿌리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 영원한 번성에의 염원이 담긴 기록이다. 핵가족 시대, 화장제(火葬制)가 많이 이루어지는 작금이지만 이 사회의 기초인 가족 공동체의 사랑을 사후(死後)에까지 이어가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