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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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經山日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상철 |
성격 |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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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원작자] | 정원용 |
창작연도/발표연도 | 1802년~1873년 |
[정의]
조선 후기 정원용이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
[개설]
『경산일록(經山日錄)』은 경기도 광명의 대표적 인물인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언어학자인 정원용(鄭元容)[1783~1873]이 과거에 급제한 1802년부터 1873년 운명하기 며칠 전까지 약 71년에 걸친 생활상을 기록한 일기이다. 『경산일록』에는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때의 정치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경산일록』은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50년 동안 쓴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 보다 기간이 22년 길다. 『경산일록』에는 정원용이 기억을 더듬어 태어나면서부터 과거 급제 전까지의 내용도 기록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90년의 전 생애를 기록한 일기라고 할 수 있다.
[구성]
『경산일록』은 분권이 되지 않은 전 17책, 10행 20자로 되어 있으며, 1책이 보통 80장 안팎이다. 날짜가 바뀔 때마다 행을 달리 하여 썼다. 가장 얇은 제4책이 35장, 가장 두꺼운 제16책이 102장이다. 신묘년(1831)과 임진년(1832)의 일기만 실린 제4책은 이 시기의 연행일기(燕行日記)인 『연사록(燕槎錄)』이 따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얇아졌으며, 제16책은 경복궁 중건에 관한 기록이 많은 을축년(1865), 병인년(1866) 시기이기 때문에 두꺼워졌다. 표지에는 간지(干支)를 밝혀 목차를 대신하였다.
제16책부터는 만년의 정원용이 다른 사람을 시켜 필사하도록 하였다. 분량으로 보면 가주서(假注書)[주서가 사고를 당할 때에 그 일을 대신 맡아보게 하기 위하여 정원 이외로 둔 승정원에 속한 정7품의 벼슬]에 추천된 계해년(1803년)부터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듯하다. 이때 자신에 관한 기록도 남기기 시작했는데, 1803년 이전 시기의 기록도 이때 기록한 듯하다.
한편 정원용의 장남 정기세(鄭基世)[1814~1884]는 1822년부터 1883년까지 일기를 썼으며, 손자 정범조(鄭範朝)[1833~1897]도 1859년부터 1897년까지 일기를 써서 1859년부터 1873년까지 15년 동안은 3대가 각기 별도의 일기를 썼다. 각기 다른 직책을 맡아 벼슬하고 있었으므로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다른 기록을 남겼는지 비교할 수도 있다.
[내용]
『경산일록』 제1책은 정원용이 태어난 날, 즉 1783년 2월 18일부터 시작된다. 이 기록은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에 보완한 것이다. 일기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책: 기유(1789, 7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둘째 누이동생이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병인(1804, 22세) 가주서에 첫째 후보로 올라 낙점되었다. 이긍익이 세상을 떠났다. 북한산에 잠시 머물렀다.
제2책: 계유(1813, 31세) 부친과 장인의 회갑연을 치렀다. 규장각직각 겸 교서관교리에 제수되었다. 아버지께서 재령군수가 되셨다. 무인(1818, 36세) 아버지께서 목사(牧使)로 계시는 동안에 진주에 근친을 갔다. 건강이 좋지 않았다.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제3책: 신사(1821, 39세) 영변부사로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를 겸하여 괴질이 퍼진 서북 지방을 수습하였다. 호적에 의거하여 환곡을 균등하게 나누어 주었다. 평안도의 민폐(民弊)를 조사, 보고하였다. 을유(1825, 43세) 산역(山役)을 마치고 시흥의 여막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병술(1826, 44세) 시흥의 여막과 고양 현천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한성부 좌윤(左尹)에 첫째 후보로 올라 낙점되었다. 병조참판에 첫째 후보로 올라 낙점되었다.
제4책: 임진(1832, 50세) 청나라에서 3월에 돌아왔다.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첫째 후보로 낙점되었다. 막내아들 기명의 혼사를 치렀다. 김조순이 세상을 떠났다.
제5책: 계사(1833, 51세) 시흥과 광주에서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창덕궁의 희정당에 불이 났다. 홍석주, 서희순, 남공철 등과 모임을 가졌다. 갑오(1834, 52세) 경술시에 시관으로 나갔다. 순조께서 승하하셨다. 맏손자가 태어났다. 을미(1835, 53세) 압록강 변에서 동지사 일행을 맞이하였다. 규장각 관리들과 함께 실록과 『일성록(日省錄)』을 정리하였다. 신명원, 김응근, 윤국렬 등과 모임을 가졌다.
제6책: 정유(1837, 55세) 예조판서에 올랐다. 장악원(掌樂院)의 업무를 보았다. 아들 기세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제7책: 경자(1840, 58세)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낙민루의 시회에 나갔다. 남공철이 세상을 떠났다. 가래와 번열기가 심해졌다.
제8책: 계묘(1843, 61세)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헌종 비 효현왕후 김씨가 돌아가셨다. 부부가 회갑을 맞았다.
제9책: 기유(1849, 67세) 헌종께서 승하하셨다. 덕완군[철종]의 영립을 주관하여 강화도에 가서 모셔 왔다.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말미를 얻어 쉬었다.
제10책: 기유(1849, 67세) 건강이 안 좋아졌다.
제13책: 정사(1857, 75세) 순조 비 순원왕후께서 돌아가셨다. 순종의 묘호(廟號)도 순조로 고쳤다. 인정전을 수리하는 일을 박희수, 김도희, 조두순 등과 의논하였다.
제14책: 경신(1860, 78세) 한성에 전염병이 크게 퍼졌다. 손자 범조가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외손 윤자복이 병으로 죽었다. 임술(1862, 80세) 진주, 익산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충청, 경상, 전라 각지로 확대되었다. 임술민란이 일어났다. 아들 기세가 판의금부사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제17책: 1월 1일에 다례(茶禮)에 동참하였다. 91세 생일은 드문 일이므로 고종이 축하연을 베푸실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쌀, 목화, 기름 등을 하사받았다. 1월 2일에 담체(痰滯), 오한 등의 증세로 약을 지어 먹었다. 1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특징]
『경산일록』은 정원용이 1783년부터 1873년까지 조정과 개인사의 대소사를 기록한 것이다. 사건의 중요성에 따라 실록에는 소략하게 기록되었지만 『경산일록』에는 상세하게 기록된 내용도 있으며, 간략하게 기록한 것도 있다. 이는 정원용이 평소에 귀와 눈으로 몸소 경험한 실제 사실들이다. 특히 정원용의 만년에는 서리를 시켜 정서하였기 때문에 글씨가 바르고, 오자도 많지 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경산일록』은 단순한 개인 기록을 넘어서 외척 세도가 발호한 철종~고종 연간에 안동김씨가 아니면서도 30년 넘게 재상을 역임한 원로의 경륜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 가운데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급제하여 벼슬 생활을 시작하는 과정부터 출퇴근하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사대부의 생활사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경산일록』은 헌종의 죽음과 철종의 즉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등장 등 국내외 정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외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라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후세의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