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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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觀感亭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학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관감정(觀感亭)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임금이 지어준 관감정」은 광명시의 대표적인 인물인 청백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퇴관하여 빈한하게 사는 것을 보고, 인조(仁祖)가 관감정을 지어 하사하였다는 정자 유래담이다.
[채록/수집상황]
2006년 광명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광명시지』 제1권의 565쪽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내용]
관감정은 시흥군의 서쪽에 오리 이원익이 퇴관하고 은거하였던 곳이다. 인조가 승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어오게 하자, 승지가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임금이 그 거처를 묻자, 대답하기를 “초가집이 소조(蕭條)[고요하고 쓸쓸함]하여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자가 단지 몇 칸의 초가집이라니, 만약 모든 벼슬아치들이 이와 같다면, 어찌 백성의 빈곤을 근심하겠는가! 본도에 명령하여 정당(正堂)을 지어 주도록 하여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소박한 침구를 하사하고 검소한 덕을 바로 잡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을 위하여 집 한 채를 지어 주니, 대개 신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감동하는 곳으로 삼으려 함이니라.”고 하니 완평(完平) 이원익도 할 수 없이 들어가 거하였다. 병자호란 때 집이 훼손되어 자손들이 중건하였고, 죽은 뒤에 남은 상(像)을 받들어 현판을 관감정이라 하였다.
[모티프 분석]
「임금이 지어준 관감정」의 주요 모티프는 ‘청백리에 대한 임금의 보살핌과 보상’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렴 정신은 탐욕의 억제, 매명 행위의 금지, 성품의 온화성 등을 내포하고 있다. 「임금이 지어준 관감정」에 나타난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함께 백의민족의 예의 국가관에 의한 전통적 민족정신이며, 이상적인 관료상이기도 했다. 곧고 깨끗한 관리는 모든 백성들의 귀감이다.
청백리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면 그것은 청백리라 할 수 없다. 이원익은 임금이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자가 단지 몇 칸의 초가집이라니, 만약 모든 벼슬아치들이 이와 같다면, 어찌 백성의 빈곤을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본도에 명령하여 정당을 지어 주도록 했다. 이처럼 청백리는 본인은 바라지 않지만 보상을 받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