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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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元翼-孫女-許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학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이원익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원익의 손녀사위 허목」은 광명시의 대표적인 인물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음을 알려 주는 지인지감(知人之感)형 인물담이다.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현손(玄孫)인 이익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호성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역임한 문신이다. 이원익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유명하다. 1630년(인조 8)에 2칸 초가인 선생의 집에서 비가 새므로 왕이 새집을 하사했는데 1693년(숙종 19) 인조가 하사한 집터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오리영우(梧里影宇)’라 편액하였다.
허목(許穆)[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미수(眉叟)이다.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정승[三公]에 올랐다.
[채록/수집상황]
1993년 광명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광명시지』의 575~578쪽과 1996년 광명문화원에서 간행한 『광명의 뿌리』의 167~168쪽에 수록되어 있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내용]
옛날 서면 소하리[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는 조선시대의 높은 벼슬을 지닌 오리 이원익 정승이 살았다. 그에게는 결혼을 해야 할 나이 든 귀여운 손녀가 있었다. 그래서 오리 이원익 대감은 오며 가며 손녀사위 감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느 날 정승의 눈에 번쩍 뜨인 젊은이를 만났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집으로 오게 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정승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은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
“아니 대감, 신랑을 길에서 얻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말씀입니까? 대체 그래 어느 집안의 자식이랍디까?” 하자 정승은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 하니까 부인은 “대감, 그동안 좋은 댁의 청혼도 거절하고 고르신 것이 겨우 시골 가난뱅이 선비의 자식이란 말이오?” 하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덧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하인이 신랑이 있는 방으로 음식상을 가지고 들어가자 신랑은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두 손으로 받기에 하도 이상하여 하인이 “어찌하여 상을 직접 받으십니까?”라며 그 연유를 물었다. 신랑은 “여보게 음식은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거늘 어찌 앉아서 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대답하였다. 하인은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신랑은 과묵한 젊은이로 이름은 허목이라 하였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신랑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정승만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는 정승이 허목을 불러 여행을 하면서 학문을 닦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래서 허목은 여행을 떠났다. 약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리 정승은 “잘 다녀왔느냐? 그래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허목은 “예, 장여헌 선생이라는 훌륭한 선비를 만나 학문을 배우고 책을 얻어 왔습니다.” 하자 오리 정승은 매우 만족해했다. 마침내 허목은 정승이 본대로 우의정이란 높은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같이 정승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림이 없었다.
[모티프 분석]
「이원익의 손녀사위 허목」의 주요 모티프는 ‘지인지감의 능력을 지닌 이원익’, ‘장여헌에게 사사 받은 허목’ 등이다. 인물 됨됨이를 알아채고 미래를 예견하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이원익과 가난한 시골 선비의 자식인 허목이 초야에 묻힌 스승을 잘 만나서 우의정까지 올랐다는 인물담이다.
이원익은 사람의 겉은 보지 않고 그 내면을 보고 판단했다. 옛날 혼인이란 신분과 권력의 상승을 노린 수단으로 여겼다. 이원익은 이러한 타성을 버리고 시골 가난뱅이 선비를 손녀사위로 택했다. 설화에서는 흔히 있는 모티프로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이 후에 훌륭하게 된다는 귀결이다.
바보스런 사위였던 허목이 끝내 우의정까지 이른다. 이원익은 사위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허목은 시골에 가서 장여헌에게서 사사하여 돌아왔다. 이것도 파격적인 생각이다. 허목은 장안에서 명망 있는 훌륭한 스승을 택하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초야(草野)에 묻혀 고고하게 학문을 하는 당시의 유명한 사상가이며 철학가인 장여헌에게서 사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