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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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懷園-古木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
집필자 | 최인학 |
성격 | 설화|신이담|수목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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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민회빈 강씨 |
관련지명 | 학온동 능촌마을 |
모티프 유형 | 고목에 상처를 주면 발생하는 동티 |
[정의]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지역에서 영회원의 고목(古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영회원가의 고목」은 나무를 이유 없이 자르면 징역살이를 하는 등 마을에서 동티가 나자 주민들이 나서서 고목을 자르지 못하게 했다는 신이담이자 수목담이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는 사적 제357호인 영회원(永懷園)은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무덤이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1644년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환국 후 두 달, 병중에 있은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하게 되었다.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소현세자의 원손은 왕위 계승 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강빈과 반목질시하던 조소용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강빈은 인조 거실 근처에 가서 통곡하고, 그때부터 왕에게 조석문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후원 별당에 유치되었다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어 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귀양을 가게 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장살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그 뒤 1718년(숙종 44)에 세자빈 강씨의 결백함이 밝혀져 민회빈으로 복위되고, 복원묘(復元墓)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903년(고종 7)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채록/수집상황]
1999년 광명문화원에서 발행한 『학온동지』의 66쪽에 실려 있다. 이는 당시 광명시 학온동 능촌마을 주민 노재철[남, 73] 등 5명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채록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내용]
광명시의 영회원 가는 길에는 4백 년이나 되는 역사의 나무가 서 있다. 마을 어른들은 4백 년이라는 예측이 그냥 상징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4백 년은 훨씬 넘었겠지만 그냥 ‘표시’를 하기 위해 대충 추측한 것이라고 보인다.
옛날, 마을 사람들은 술과 나무를 가장 큰 법칙으로 삼으며 살았는데, 한 때 그 큰 나무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마을 남자들이 힘을 합쳐 지서[파출소]를 상대로 시위까지 했다고 한다. 생나무를 이유 없이 자르면 징역살이를 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영회원가의 고목」의 주요 모티프는 ‘고목에 상처를 주면 발생하는 동티’이다. 신령스런 나무에 대한 믿음이 강한 주민들은 고목을 자르면 까닭 없는 우환이 발생하여 마을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오래된 나무는 마을과 함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마을을 지키는 나무를 베어 동티[재앙]를 받은 예는 많다.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면에서는 은행나무를 베려고 하자 나무가 울며 마을 사람들이 병으로 앓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청송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경이 마을 나무를 베어내 그 자리에 파출소를 지으려고 하자 벤 사람의 온가족이 급사를 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일은 수목 신앙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