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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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吉洞-都堂告祀 |
이칭/별칭 | 산신제,도당고사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옥길동 식골마을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경기도 광명시 옥길동 식골마을에서 주민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옥길동 식골 도당고사는 매년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마을 사람이 모두 여름과 가을에 무병하고 무고하기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산신제’, ‘도당고사’ 등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1993년 조사에 의하면, 산신제는 연 2회 지내는데 날짜는 7월과 10월에 택일을 하다가 요즘은 7월 1일과 10월 1일에 지낸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산신제를 지낼 때에는 마을 중앙의 향나무가 있는 대동 우물을 청소하고 우물 고사를 지냈다. 그 후에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대동 우물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4~5일도 하였는데 이후 이틀 정도로 기간을 줄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도당고개의 도당나무에서 제를 지낸다.
[절차]
산신제를 지내기 약 10일 전에 마을에서는 대동 회의를 열어 청렴하고 바쁘지 않은 사람으로 당주를 뽑는다. 부인이 월경 등이 있거나 주변에 부정이 있는 사람은 제외된다. 당주로 결정되면 당사자는 보통 힘이 들고 금기 사항도 많아 일단 사양하지만 다시 맡기면 순종하여 정성을 다한다. 산신제의 날이 잡히면 마을의 대동 우물을 치고 마을길을 청소하며 집집마다 청결하도록 힘을 쓰는데, 이때부터 마을의 금기가 시작된다.
마을의 입구와 당주 집에는 금줄과 황토를 뿌리고, 도당나무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서도 안 된다. 예전에 옥련동 사람은 도당나무 앞에서 말을 내리지 않고 가다가 떨어져 죽었으며, 도당나무에 정성을 드리지 않은 사람이 병사한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마을에서는 도당나무에 정성을 들인다. 마을 사람들은 제를 지낼 때까지 피를 보지 않고, 닭을 잡는 일도 삼가며, 제가 끝날 때까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제일이 잡힌 후 마을에 상을 당하면 산신제는 다음으로 연기된다.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이 식골에 들어와서도 안 된다.
당주는 마을에서 추렴한 기금으로 여름에는 과일·떡·소머리·술·생선 등을 올리고, 가을에는 햇과일·떡·소머리·술 등을 올리나 생선은 올리지 않는다. 산신제에 올리는 술은 만수산 아래에 있는 대동 우물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물로 정성스럽게 빚은 술을 이용한다. 우물을 길어서 새물이 나오게 함을 이 마을에서는 개수(改水)라고 한다.
산신제는 여름에는 대략 정오가 지나서 시작하고, 가을에는 해가 떨어지면 시작한다. 산신제를 지내는 당일 아침, 무당과 악대들은 대동 우물로 와서 우물고사를 먼저 올린다. 그리고 피리를 불고 장구, 꽹과리, 징을 치면서 동네를 일주한 다음 도당고개로 올라가 천막을 치고 산신제를 준비한다.
산신제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춤을 추고 마을굿을 한다. 마을의 유지들도 함께 참여하여 같이 춤을 추면서 무당의 징에 돈을 떨어뜨린다. 제의가 시작되면 음악도 일단 중지하고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다. 무당은 동전을 떨어뜨리고 음악에 맞추어 제석거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축문을 낭독하고 다시 세 번 절한다. 제의가 끝나면 징에 떨어뜨린 돈과 마을에서 조금씩 추렴한 쌀 몇 말을 무당에게 수고비로 지급한다.
[현황]
옥길동 식골 도당고사가 도당고개에서 열리게 되면 이웃 마을에서 술장사, 엿장수들이 모여 들어 천막을 치고 장사도 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규모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옥길동 식골 도당고사는 예전보다 많이 축소되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해 규모도 크고 잘 지내고 있는 편이다.
2010년 1월 26일 필자가 재조사를 해본 결과 근래에는 예전과 달리 무당을 부르지 않고 주민들만으로 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당주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였지만 지금은 전 부녀회장 집에서 음식을 장만한다. 현재는 동제와 관련된 일을 노인정에서 처리하고 있으니, 과거 당주 집의 기능을 노인정이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