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54 |
---|---|
한자 | 姜邯贊 |
영어음역 | Gang Gamchan |
이칭/별칭 | 강은천(姜殷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지석 |
성격 | 문신 |
---|---|
성별 | 남 |
생년 | 948년 |
몰년 | 1031년 |
본관 | 금천 |
대표관직 | 문하시중 |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금천(衿川)[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본래는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로 하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의 분파(分派)로 강감찬(姜邯贊)[948~1031]은 인헌공파(仁憲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강감찬의 5대조로 신라에서 문하시랑을 지낸 여청(餘淸)이 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 호족으로 성장하여 금주가 본관이 되었다. 아버지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추대된 강궁진(姜弓珍)이다.
[활동사항]
강감찬은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1018년(현종 9)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직하는 벼슬에 올랐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상 위대한 3대 전승 대첩으로 손꼽힌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따르면 귀주 대첩은 흥화진(興化鎭)[현 의주군 위원면]에서 고려군이 큰 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하천을 막아 적이 오기를 기다려 물을 흘려보내 적을 물리친 후 이어서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거란군을 패퇴시켰다. 그리고 귀주에서 적을 대파하였는데, 포로로 잡은 군사와 거두어들인 갑옷과 투구, 병장기, 말, 낙타가 헤아릴 수 없고 생환한 자는 겨우 수천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마침내 거란군은 물러나고 더 이상 고려를 침입하지 못하였다. 이때 고려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현 의흥]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명장으로 손꼽히는 강감찬은 원래 문관으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무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문헌 또는 구전을 통해 전래되는 설화의 많은 이야기가 신묘하고 용맹하며 비범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설화는 고려를 국난에서 극복한 강감찬의 영웅적 이야기를 탄생과 생애, 인품 등으로 구분하여 나타나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러나 구태여 설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인품과 덕망, 가치관을 『고려사』 열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려사』 열전에 강감찬의 외모에 대해 “키가 작고 못생겼으나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높은 인품과 처신이 신중하고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으며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글은 강감찬의 사상적 내면과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거란과 항쟁을 할 때 위기 대처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무장으로서의 용맹함도 있으나 더욱 주목되는 점은 적극적인 대항 자세와 치밀하고 조직적인 계산으로 국난을 극복한 전략가로 더욱 빛난다고 할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묘소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으나, 1963년 후손들에 의해 지석(誌石)이 발견되었으며 1964년 분묘를 조성하고 1967년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상훈과 추모]
1031년(덕종 1)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 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사후에는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수태사겸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는 본래 이원익(李元翼)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향리에 살며 마을의 촌로들과 함께 강감찬과 고려 말의 문신 서견(徐甄)을 모신 이현사(二賢祠)를 세우려 한 장소이다. 이후 1658년(효종 9) 고장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이원익도 함께 배향하고 삼현사(三賢祠)로 불렀으며 1676년(숙종 2) 사액 서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정조 때 사액 서원으로 충현서원이 건립되었고, 1856년(철종 7) 개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서원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 일부만 남아 있다. 충현서원지는 경기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의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이다. 또한 사적 제223호인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2리의 공신숭의전(功臣崇義殿)에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왕과 강감찬 등 16명의 고려 공신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