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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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愼 |
영어음역 | Yi Sin |
이칭/별칭 | 전풍군(全豊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부인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활동사항]
이신(李愼)[1570~1634]은 임진왜란 때 영유 지방에서 시행된 무과 시험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평안도 안주와 강계판관 등을 비롯하여 주로 평안도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그리고 함경북도병마절도사와 영흥부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李适)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킬 당시 이괄의 휘하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고 조정군에 투항함으로써 전세가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괄의 군사는 1만여 명으로 평안도 영변을 출발, 도원수 장만(張晩)이 주둔하는 평양을 피해 한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이신을 비롯한 휘하의 별장은 야심한 시간을 노려 포를 터트리고 숙영지를 혼란에 빠지게 한 후 60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장만의 진영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정부군의 중군으로 한양 부근 마제에서 이괄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난이 평정되는 데 일조하였다.
[학문과 사상]
이괄의 난 당시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고 정부군에 합류하는 자세에서 볼 때 무신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는 정부군에 합류하는 전술적 선택과 함께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전진(戰陣)에 능한 자로 훈련도감에 제수되는데, 이러한 내용은 병법에 능숙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청나라 군이 철수하며 약탈 행위가 심해지자 정예병 3,000명을 이끌고 정충신(鄭忠信) 장군 휘하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는 내용에서도 그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하안동 도덕산에 있다. 부인 전주최씨와의 합장묘로 문인석과 동자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전풍군(全豊君)에 봉해졌다. 사후 자헌대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