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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39
한자 義人
영어의미역 Righteous Pers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최현규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 출신이거나 광명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의로운 활동을 한 사람.

[개설]

예부터 광명 지역에는 이원익(李元翼) 등의 충신들과 송수회(宋秀誨) 등의 효자들이 많은 충효의 고장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는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침략에 맞선 의인들이 많았다.

[인물 및 활동 내용]

성우경(成禹慶)[1842~?]은 개항기의 항일 민족 운동가로 시흥군 남면 유등리[현 광명시 학온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면에서 동학(東學)의 집강(執綱)으로 활동하면서 1898년(고종 35)과 1904(고종 41) 두 차례에 걸쳐 이 지역의 다른 집강들과 함께 이른바 시흥 농민 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군인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경기재판소에서 주모자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2년 후 한성재판소에서 1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하는 천추경절(千秋慶節)을 맞아 평리원 기결수 석방령(平理院旣決囚釋放令)에 따라 고령자임이 고려되어 특사로 풀려났다.

이종원(李宗遠)은 일명 이원중(李元仲) 또는 이종운(李鍾雲)으로 불렸는데,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7일 밤에 아들 이정석(李貞石)이 독립 만세 시위를 하다가 순사보 최우창 등에게 체포되어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강제 연행되자 주민 200여 명을 이끌고 노온사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구내와 보통학교 뒤편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992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장원겸(張元謙)은 시흥군 서면 철두리[현 광명시 철산동] 출신이다. 1907년 음력 8월 14일 밤 당시 42세였던 그는 박홍석(朴弘錫)·연창수(延昌洙) 등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직산군(稷山郡) 읍내에 침입하여 경찰 주재소의 단총 1정을 빼앗아 달아났다. 후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이영래(李永來)는 시흥군 서이면 비산리[현 안양시 비산동]에서 출생하여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보고 돌아와, 3월 27일 서이면 일동리[현 안양시 관양동]에서 사람들에게 동참해 줄 것을 설득하고, 주민 다섯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쳐 이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최주환(崔周煥)유지호(柳志浩), 최정성(崔正成), 최호천(崔浩天)은 모두 시흥군 서면 소하동[현 광명시 소하동] 출신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 사람인 이정석이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자 3월 28일 밤 이정석 탈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윤의병(尹宜炳)[1900~1960]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 출신으로 이정석의 탈환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 전선에 투신하여 활동했고, 해방 후 귀국하여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8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재항(李載伉)[1887~1965]은 시흥군 수암면 논곡리 출신이다. 3·1운동 당시 처가인 화성군 서신면에 있다가, 3월 28일 사강장날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이원행·홍성유 등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대장 노구치[野口]를 죽이자,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 경찰이 민가를 불사르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차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자 이재항은 승려로 변장하고 금강산을 비롯하여 묘향산과 지리산 등으로 피신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해방이 되자 많은 곳에서 정계에 투신하라고 권유를 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후진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1965년 2월 26일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화성군 서신면 전곡리(前谷里)에 3·1독립기념비가 세워졌다.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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